미국과 러시아의 사이버보안 갈등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산 소프트웨어를 의식해 “해외 소프트웨어를 러시아산으로 대체하지 않을 경우 모든 정부 조달사업에서 배제하겠다”고 국내 기업들에 엄포를 놓은 데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러시아 주요 백신기업 제품의 정부 사용을 금지하고 나섰다. 정보 유출·시스템 훼손 등 안보 문제가 주요 배경이지만 ‘러시아 커넥션’ 의혹에서 벗어나려는 미 행정부의 속내와 자국산 소프트웨어 점유율을 끌어올리려는 러시아 정부의 의도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13일(현지시간) 미 국토안보부는 90일 내 모든 연방정부기관에서 러시아 정보기관과의 연루 의혹을 받은 러시아 보안업체 ‘카스퍼스키랩’의 소프트웨어 사용을 중단하라고 조치했다. 카스퍼스키랩은 러시아 출신 유진 카스퍼스키가 설립한 글로벌 대표 백신 업체로 미 맥아피·시만텍, 체코 아바스트 등과 경쟁해왔다.
국토안보부는 성명에서 “업체의 백신 프로그램은 정부 컴퓨터나 저장파일에 높은 접근 권한을 갖고 있다”며 “러 정부 단독으로 또는 업체와 협업해 미 국가안보와 관련 있는 정보 및 시스템에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혀 업체와 정부 간 결탁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미국의 대표 전자제품 유통업체 베스트바이도 카스퍼스키랩의 소프트웨어를 더 이상 판매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판매중단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토안보부의 결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해석이다. 아마존·스테이플스·오피스디포 등 다른 업체가 뒤따를 가능성도 제기된다. 판매중단이 확산될 경우 카스퍼스키랩의 위상 추락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서는 미 정부의 이번 조치가 ‘러시아 커넥션’ 의혹에서 벗어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의도를 담은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 커넥션을 ‘마녀사냥’으로 불렀던 대통령이 사용금지 조치에 찬성했다”고 꼬집었다. 뉴욕타임스(NYT)도 “사이버 교란 위협을 경시해온 행정부가 다른 위치에 서게 됐다”고 평했다.
이에 앞서 푸틴 대통령은 지난주 말 자국 정보기술(IT) 업체 대표들과 만나 해외 소프트웨어를 자국 제품으로 변경하지 않는 기업에 페널티를 주겠다고 경고했다. 푸틴 대통령은 “국가안보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분야들이 있고 (이들 분야에서) 해외 제품을 사면 안 된다는 점을 모두 알고 있다”면서 “버튼을 누르는 순간 모든 시스템이 망가질 수 있다”고 해외 소프트웨어 사용이 사이버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IBM(제품)이나 외국 소프트웨어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언론은 이번 조치가 IT 기술 개발 및 인력 육성에 부심해온 정부 정책의 일환이라고 해석했다. 푸틴 대통령의 수년간의 노력에도 러시아 내 자국산 소프트웨어 점유율은 30%에 불과하다. /김희원기자 heewk@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