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러시아 발다이클럽 아시아 콘퍼런스. 콘퍼런스 참석차 방한한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외교차관이 한국과 러시아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북핵과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러시아의 입장을 알려달라는 질문이 쏟아졌다. 그간 러시아가 6자 회담 당사국 중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잘 내지 않았던데다 북한과의 관계가 과거에 비해 소원해진 중국을 대신해 러시아가 북한을 대화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꽤 커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 측 6자 회담 수석대표이기도 한 모르굴로프 차관의 입에서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을 겨냥한 발언이 나왔다. 모르굴로프 차관은 “북한이 두 달 넘게 핵·미사일 도발을 자제하는 것은 쌍중단(雙中斷, 북한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연합 군사훈련 중단) 개념 안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미국은 군사훈련을 축소할 계획을 안 한다. 오히려 새로운 훈련을 계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6자 회담 재개 등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대화 자리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입장 표명이었다. 이에 더해 그는 “쌍중단은 중국과 러시아가 함께 제안하고 있는 합리적인 방안”이라는 입장도 강조했다. 이 역시 쌍중단 불가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발언이었다. 게다가 이날 모르굴로프 차관의 발언은 미국을 겨냥한 동시에 우회적으로 한국 측에도 불만을 표시한 것이기도 했다. 한국 역시 북한의 핵 위협이 커지면서 최근 들어 미국과 함께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확대하고 한미 연합 군사훈련도 강화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의 관계 진전을 위해 러시아판 다보스포럼으로 불리는 행사까지 한국으로 유치해 개최하는 등의 공을 들였지만 6자 대화의 어려움만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게다가 현재 중국과의 관계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논란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일본과는 별다른 관계의 진전이 없다. 한국이 운전석에 앉아 남북 문제를 주도한다는 ‘한반도 운전자론’을 한반도 해법으로 줄곧 강조하고 있지만 ‘전쟁과 평화’의 불안한 한반도 동거라는 상황은 변함이 없고 6자 회담 당사자들의 입에서는 여전히 서로 다른 말이 나오고 있을 뿐이다.
그 와중에 청와대와 외교부·국방부 등이 북핵과 4강 외교 등에서 엇박자를 낸다는 지적은 잊힐 만하면 툭툭 불거져나온다. 부처뿐 아니라 청와대 측근들 사이에서도 한편에서는 미국 전략자산을 통한 북핵 억지를 강조하는데 또 한편에서는 쌍중단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상황이 중구난방이다 보니 특정 부처, 특정 인물에 대한 책임론까지 커지고 있다. 북한이 무력 도발을 중단한 지 74일이 되기는 했지만 핵·미사일 실험을 곧 재개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그리고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일까지는 73일밖에 남지 않았다. 한반도 운전도 걱정이지만 운전석에 앉을 생각 전에 내부 사전 조율부터 신경 써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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