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국가인공지능(AI)컴퓨팅센터 구축 사업이 재공모 끝에 이달 13일 또 유찰됐다. 이재명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시절 광주를 사업지로 낙점했다가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의 반발을 샀던 바로 그 프로젝트다.
정부는 올 1월 민관 합동으로 ‘AI 대전환 시대의 핵심 축’을 만들겠다며 비수도권 지역에 국가AI컴퓨팅센터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총사업비는 최대 2조 5000억 원 규모로 이를 통해 그래픽처리장치(GPU) 3만 장 수준의 연산 자원을 확보해 국내 AI 산업의 자립 기반을 확보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제고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도 제시했다.
이 같은 계획에 광주를 비롯해 전남·대구·경북·경남·충남·강원 등 사실상 모든 비수도권 지자체가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인구 소멸과 기존 산업 노후화로 지역경제가 붕괴 직전까지 약화된 상황에서, 이 사업은 각 지자체에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미래 산업의 중심지로 거듭날 마지막 기회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절박함은 지자체 간 과열 유치 경쟁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나 정작 정부와 손잡겠다고 나선 민간기업이 단 한 곳도 없었다. 5월 1차 공모에 이어 6월 2차 공모까지 신청 기업 수가 ‘제로(0)’였다. 참담한 결과다. 기업 참여가 없었던 이유는 단순히 사업에 대한 관심 부족이 아니었다. 민간의 진입을 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뒷걸음질 치게 만들 수준으로 사업구조를 짠 채 공모를 두 차례나 강행한 정부의 무리한 추진이 본질적 원인이었다.
현재의 사업구조를 보면 정부는 51%의 지분을 갖고 주도권을 행사하는 반면 민간은 49% 지분을 갖되 리스크와 손실은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국가AI컴퓨팅센터는 태생적으로 수익보다 공익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데 운영 부담은 일방적으로 민간에 전가되는 셈이다. 애초에 업계에서 “바보가 아닌 이상 참여하겠느냐”는 자조 섞인 반응이 나왔던 이유다.
국가AI컴퓨팅센터는 단순한 지역 유치 사업이 아니다. 한국 AI 생태계의 기반을 좌우할 핵심 인프라 전략이자 향후 기술 주권 확보를 위한 국가적 수단이다. 이런 사업의 반복된 유찰은 단순한 행정 실패가 아니라 정부의 미래 전략 부재와 정책 설계 미숙이 불러온 구조적 실패라는 점에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또한 미국·유럽·중국 등 주요 기술 강국이 AI 인프라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는 시점에서 정부의 무모하고 엉성한 사업 추진 탓에 모두의 ‘시간’이 허비됐다는 점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목을 빼고 기다린 지자체도, 새로운 성장 기회를 잡으려던 민간기업도, 더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글로벌 경쟁 구도에 놓일 국민들도 우위에 설 기회를 놓쳤다.
나아가 이번 유찰 반복이 향후 추진될 정부 주도 AI 프로젝트 전반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정부는 방향만 외칠 뿐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민간의 회의가 확산되면 앞으로 정부가 아무리 괄목할 만한 혁신 담론을 설계하고 뛰어난 정책을 내놓아도 민간은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경선 당시 ‘AI 100조 투자’를 공약하며 대한민국을 AI 초강국으로 도약시키겠다는 비전을 천명한 바 있다. 집권 이후에도 AI를 국가 어젠다의 중심축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혔다. AI미래기획수석비서관도 신설했다. 정책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AI를 잘하겠다’는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 민첩하게 실행 가능한 정책 설계가 시급하다.
정책의 시간과 기술의 시간은 다르다. AI 생태계는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지금의 정책 지체는 곧바로 산업적 격차로 이어진다. 기술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정을 봐주지도 않는다. 앞으로 내달릴 뿐이다. 경쟁국이 1년을 전진할 때 우리가 6개월을 허비하면 격차는 단순히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로 벌어진다. 한국의 AI 경쟁력 시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늦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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