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담담하지만 가슴 아픈 글 하나가 올라왔다. “저는 10월1일까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둔 세 아이의 엄마였다”며 운을 뗀 청원자는 “하지만 지금은 아이 하나를 하늘나라에 떠나 보내 매일 울며 지옥을 지나고 있다”고 밝혔다. 청원자는 서울랜드 경사로에서 제동장치를 걸지 않은 주차된 차량이 미끄러져 아이를 잃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주차된 차도 피해야 하는 세상이 정상이냐”고 반문하며 “아이를 더 낳는 세상이 아니라 있는 아이나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청원자는 주차장에서의 제동장치 안내문 부착 의무화, 사고 시 처벌 등의 관련 법 제정을 촉구했다. 청원은 28일 현재 약 10만명의 동의를 얻었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빠르게 전파되며 국회에서 법 개정 움직임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사례는 8월19일 도입된 후 100일을 넘긴 청와대 국민청원제의 순기능으로 볼 수 있다. 제도가 없었다면 특정인의 안타까운 사연 정도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청원제가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명이 여러 개의 인터넷 계정을 만들어 중복 청원과 동의를 하며 여론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직접민주주의의 실현 등에서 큰 방향성은 맞지만 디테일이 보완돼야 제도가 안착할 수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청원권은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이라며 “이를 활성화하는 것이므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헌법 26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가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돼 있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도 “전 정권에서 청와대와 국민 간 소통이 너무 막혀 문제였다”며 “이를 보완하는 것이므로 좋은 제도라 본다”고 진단했다. 서원석 한국행정연구원 연구위원 역시 “정책을 소수의 정부 고위직이 독단적으로 결정했는데 국민이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한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평했다. 최흥석 한국행정학회장(고대 행정학과 교수)은 “말도 안 되는 청원이 많다고 하지만 그런 의견도 사회의 일부분이 아니냐”며 “상식에서 벗어난 청원은 정책으로 반영하지 않으면 되지 그것 때문에 청원제도가 그릇됐다고 평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제도 초기인 만큼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다수다. 서 위원은 “한 사람이 여러 계정을 동원해 중복으로 청원을 하고 동의 개수를 조작할 수 있는데 국민의 의견이 정확히 반영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청와대가 모든 것을 다 답변하려는 것이 잘못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청와대는 지금까지 2건의 청원에 대한 답변(소년법 개정, 낙태죄 폐지)을 내놓았는데 모두 수석비서관이 동영상에 출연하는 방식을 택했다. 자칫 청와대가 내각이나 지방자치단체 위에 군림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고 실제 동영상의 답변 내용이 ‘가이드라인’으로 각 부처·지자체에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기우 교수는 “부처·지자체의 자율권을 청와대가 침해하는 것이 된다”고 꼬집었다.
다소 강경한 비판도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다양한 문제에 대해 전문성 없고 걸러지지 않는 감성적 목소리가 난무할 수 있다”며 “의사결정의 지연,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 비전문성의 오류, 특정 여론을 부추기는 세력의 권력화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오히려 국론분열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와 전문가가 해야 할 결정을 포퓰리즘에 맡기는 게 될 수 있다”며 “제도를 운영하더라도 엄격한 기준으로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시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 청와대 청원 목록을 추천 순으로 보면 이명박 전 대통령 출국 금지와 같은 정치적 색깔이 강한 청원이 약 10만명의 동의를 받아 5위를 달리고 있다.
/이태규기자 class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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