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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사 전문]박보영 대법관 “대법원 밀려드는 사건 과도…권리 구제 소홀함 없도록 제도개선 필요”

박보영 대법관. /사진제공=대법원




존경하는 대법원장님, 대법관님, 법원가족 여러분, 이 자리를 찾아주시거나 멀리서 축하해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1987년 법관으로 임용되어 근무하다 2004년 법원을 떠나 개인변호사로 8년간 활동하다가 다시 법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법원에서 근무할 때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다가 변호사로 활동하며 의뢰인을 직접 마주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습니다.

국민은 어려운 일에 처하면 궁극적으로 법과 법원을 통해서 억울함이 해소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분쟁이 발생하면 법원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당사자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여, 법원이 정의의 전당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재판을 통해 단순히 권리를 실현하려는 데 그치지 않고 억울함까지 해소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법원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심판자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려움을 알아서 해결해 주는 정의의 구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법제도는 법원이 심판자의 역할만 하도록 일정한 제한을 두고 있어, 국민이 바라는 재판이 구현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물리적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사건이 증가하는 것도 개별 사건에 충분한 심리를 하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국민의 기대와 법제도 사이의 차이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에서 억울함이 풀려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법원에 대한 신뢰가 심각하게 저하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법원과 국민간의 끊임없는 소통 노력을 통해서 법원의 임무와 법원 구성원의 헌신적 노력, 재판과정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얻어야 비로소 법원이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법관님들과의 합의 토론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진보적인 대법관도 보수적인 대법관도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위해 고민할 뿐 개인의 주관적 신념에 따라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판결의 결론인 주문은 비록 간결하지만 그 결론을 내기 위해서 수많은 고민, 연구와 토론이 그 뒤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인 장석주님은 ‘대추 한 알’이라는 시에서, 대추의 붉은 색에서 그 동안의 태풍, 천둥, 벼락을 보았고, 대추의 둥근 모습에서 무서리, 땡볕, 초승달의 고난을 보았습니다. 작은 대추 하나도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닌 법입니다. 대법원의 판결도 선고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최고법원인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무엇이 정의인지를 밝히는 것을 주된 책무로 합니다. 그러나 밀려드는 사건으로 대법원이 그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대법관, 재판연구관의 희생과 사명감에 기대기에는 이제는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대법원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법치주의 실현에 그만큼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국민의 권리구제에 소홀함이 없으면서도 대법원이 본연의 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제도개선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변호사 생활을 통하여 국민의 법원에 대한 믿음, 고민과 한숨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사건 하나하나를 가볍게 대할 수 없었습니다. 성심성의를 다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했고, 당사자의 억울함이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성취도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숙고할 시간이 부족한 점이 늘 아쉬웠습니다.



제가 대법관으로서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함께 고민해 준 통찰력이 깊은 동료 대법관님들과 헌신적인 재판연구관 여러분들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대법관으로서 무거운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재판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해준 비서실의 손현정 비서관을 비롯하여 전현직 직원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기간 제 자신과 공적인 일에 몰두하느라 집안 일에 소홀한 저를 탓하지 않고 지지해준 사랑하는 가족에게 미안함과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제는 소중한 가족에게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법관은 개인의 제한된 능력과 법제도 때문에 필연적으로 오판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더구나 대법관은 최고법원의 구성원으로서 최후의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오판의 위험성에 대한 중압감은 매우 무겁습니다.

성의를 다하여 재판에 임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제 능력의 한계로 사안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여 상처를 드린 분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저는 이제 법원을 떠납니다.

그 동안 법원에서나 가정에서나 은혜를 과분하게 받았습니다. 앞으로는 제 능력이 닿는 한 힘껏 되돌려주는 일을 하겠습니다.

법치주의 아래 나라와 사회와 개인이 안전하고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항상 정의롭고 아름다운 사회를 이룰 수 있도록 함께 동참하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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