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최다 안타(196개) 기록을 서건창(2014년 201안타·넥센) 선배님이 깼잖아요. 건창 형 기록을 제가 다시 깨는 게 목표입니다.”
2017 프로야구 KBO리그 신인왕으로 2018년 새해 더 큰 활약이 기대되는 이정후(20·넥센). 지난해 타율 0.324, 2홈런, 47타점, 12도루로 화려한 데뷔 시즌을 보낸 그는 올해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이정후는 고졸 신인 최초로 전 경기에 출전하며 179안타를 쌓아 역대 신인 최다 안타 신기록(종전 157개·LG 서용빈)을 수립했다. 111득점도 역대 신인 최다 득점 신기록(종전 109득점·LG 유지현)이다. 이정후는 “시즌 전에는 목표랄 게 없었다. 50안타 쳐보자 하는 마음으로 출발해서 그다음엔 100안타 가보자, 100안타 달성한 다음엔 110안타까지 좀 더 해보자…. 이런 식으로 조금씩 수정해가면서 시즌을 마쳤다”고 돌아봤다. 1개 치면 1개 더 치고 싶은 마음으로 바로 눈앞만 보면서 달렸더니 144번째인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나자 179안타로 불어나 있었다. 지난달 말 개인 훈련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정후는 각종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싹쓸이하는 ‘시상식 투어’를 소화해야 했다.
잘 알려졌듯 이정후는 ‘야구천재’ ‘바람의 아들’ 이종범(48)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의 아들이다. 그래서 별명이 ‘바람의 손자’다. “처음에 들을 때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언젠가는 없어질 별명 아닐까요?”
지난해 활약 덕에 이정후는 굳이 아버지와 연관된 별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시즌 중반에 이미 신인왕 예약 얘기가 나왔으니 100점을 줄 만하지만 그는 “시즌 막판에 체력이 떨어졌다. 체력 관리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고 아쉬운 점을 먼저 얘기했다. 딱히 슬럼프도 없었던 것 같은데 팀도, 본인도 침체해 속상했다는 8월 마지막 주를 떠올리면서는 당시를 다시 겪는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지난해 11월에는 태극마크를 달고 아시아챔피언십에도 출전해 일본전 2타점 2루타, 대만전 적시 3루타 등으로 활약했다. 일본과의 재대결이자 결승을 앞두고는 “봐주지 않고 완전히 무찌르겠다”는 장내 인터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은 통역이 애써 수위를 낮춰야 할 정도로 국내 팬들 입장에서는 화끈한 각오였다. 당시를 떠올린 이정후는 “솔직히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결승에서 다시 만나 꼭 이기고 싶다’ 정도로 얘기했어야 했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올해 자카르타 아시안게임과 2020년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 또 일본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반드시 이길 수 있게 준비하겠다”고 했다.
이정후는 휘문고 시절 아버지 이종범의 포지션인 유격수를 맡았고 KBO리그 등록 때도 내야수였다. 그러나 넥센은 시즌 내내 이정후를 외야 포지션에 고정했다. 내야 자원이 풍부한 팀 사정 때문이기도 했고 타격에 무게를 두게 하려는 배려이기도 했다. 결과는 대성공. 이정후는 “우리 팀에는 국가대표 유격수(김하성)가 있다. 유격수 포지션에 미련 같은 것은 전혀 없다”며 “지금 자리에서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데뷔 후 9번 타순에 서던 이정후는 지난해 6월부터 테이블세터(1·2번 타자)로 올라섰다. 1·2번 타자의 자격인 선구안에 대한 칭찬이 자자한데 이정후는 “비결은 없다. 1번 타순에 계속 나가다 보니 어떻게든 출루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게 됐다”며 “공을 최대한 많이 보는 습관 속에서 선구안도 좋아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장타에 대한 욕심은 버린 지 오래다. “고3 때 팀 성적이 좀 안 좋았고 그래서 4번 타자 임무를 맡았던 적이 있어요. 처음엔 기분 좋았는데 장타를 의식해서 치려다가 오히려 망쳤거든요. 파워를 보강하려고 하루에 4~5끼씩 먹은 적도 있는데 지금은 그런 욕심 없습니다. 순리대로 하려고요.” 키 185㎝인 이정후는 몸무게 80㎏으로 조금 말라 보이는 편이다.
야구를 안 할 때는 잠자는 것 말고는 하는 게 별로 없다고. 미국에 전지훈련 갔을 때도 비행 내내 푹 자 ‘미국이 이렇게 가까운 곳이었나’라며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한 시상식에서 남진의 ‘둥지’를 부른 적 있는 이정후는 사석에서도 옛노래를 즐겨 부르는 편이라고 하는데 정작 좋아하는 가수는 걸그룹 ‘레드벨벳’ 멤버인 슬기와 아이린이다. 그는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팬”이라고 강조했다.
야구선수가 안 됐다면 지금쯤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이정후는 “아버지가 원래 시키고 싶어 하셨던 운동은 골프였다. 아버지 말에 따랐다면 골프선수가 돼 있을 수도 있겠다”고 했다. 구력이 20년에 가까운 이종범은 “10년 뒤쯤에는 골프를 배우라”고 지금도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전 경기 출전이 데뷔 시즌 가장 뿌듯한 기록이라는 이정후는 올해도 전 경기 출전 기록을 잇고 싶다고 했다. 최근 개인 훈련을 하다 손가락뼈에 금이 가는 바람에 팀 스프링캠프를 거르게 된 그는 홈구장 웨이트트레이닝장에서 ‘2017년보다 무조건 더 나은 2018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팬들이 볼 때 일단 타석에 들어서면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선수라는 이미지를 심고 싶습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