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7년 12월9일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비공식 문서를 하나 전달했다. 2일 후인 12월11일 윌리엄 클라크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가 김경원 주미대사와 마주했다. 비공식 문서의 내용을 우리 측에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문서의 제목은 ‘한반도 완충지대 설정 및 중립국 창설을 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안’. 김일성 북한 주석이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통해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한 것으로 내용도 구체적이었다. △남북한 병력 각각 10만명 수준 감축 △단일민족 군대로의 통합 △핵무기 및 외국군 철수 △불가침 선언 및 휴전협정의 평화조약 대체 △군사조약을 포함한 모든 대외조약 및 협정 폐기 △중립 연방공화국 창설 및 한반도 완충지대화 등 북한 측의 주장이 세세히 담겨 있었다. 이에 대해 클라크 부차관보는 “미국 측은 소련이 북한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이를 전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하지만 미국 측에서 ‘일급비밀(Top Secret)’로 취급하고 “대외적으로 알려질 경우 향후 한반도 문제 관련 미소 간 협의에 심각한 영향이 우려되니 대외비로 하라”고 당부했다.
클라크 부차관보의 당부대로 해당 내용은 30년간 외교부 비밀문서로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30일 외교부가 30년 만에 비밀을 해제함에 따라 이 같은 사실이 외부에 처음 공개됐다.
외교부는 이날 미소 정상회담 뒷얘기를 비롯해 대내적으로는 민주화, 대외적으로는 88서울올림픽 개최로 분주했던 시대상을 담은 1987년 외교문서 1,420권(23만여쪽)을 공개했다. 후속 문서에 따르면 북한의 중립국 창설 제안을 전해 들은 우리 정부는 “거창하고 현실성이 없으며 구체적인 내용에서도 새로운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비밀해제된 외교문서는 88올림픽을 앞둔 시점에서의 남북 간 외교 신경전이 곳곳에 담겨 있다. 특히 남북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중공(현 중국)의 모습은 30년 전이나 현재나 유사하다. 1987년 초 유럽 순방에 나선 노신영 국무총리는 남북한과 중공의 관계를 묻는 펠리페 곤살레스 스페인 총리의 질문에 “중공은 북한과는 결혼을 했으나 별거하고 있고 우리와는 법적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동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또 이탈리아 총리에게는 “아시안 게임 때 중공 일부 고위층이 선수로 위장해 참가해서 우리 측과 많은 이야기 나눴다”고 전하기도 했다. 또 문서에는 북한이 88올림픽 공동 개최를 주장하다 여의치 않자 훼방 놓기로 전선을 바꾼 모습도 담겨 있다. 우방인 소련과 중공의 올림픽 참가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동유럽과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보이콧을 요청했다. 북한의 88올림픽 훼방 전선에 앞장선 인물은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당시 외교부장)이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