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9월 미 공군은 고등훈련기(APT·Advanced Pilot Training) 교체 사업 낙찰자로 미 보잉社와 스웨덴 사브社 컨소시엄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고 92억 달러(약 10조 2000억 원)의 계약을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규모가 63억 달러(약 18조 1745억 원)에 달하는 APT 사업은 미 공군의 노후화된 훈련기 351대를 교체하는 프로젝트다.
당시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미 록히드마틴社와 손잡고 사업 수주전에서 뛰어 들었지만 경쟁자였던 미 보잉社의 ‘저가 입찰’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고배를 마신 것이다.
KAI 측은 “록히드마틴사와 협력해 전략적인 가격으로 입찰에 참여했지만 보잉사의 저가 입찰에 따른 현격한 가격차이로 탈락하게 됐다”고 했다. 미 공군도 발표문에서 “경쟁을 통해 훈련기 구매에 최소 100억달러를 절약하게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7년이 지나고 2025년 한국 전투기가 미국 군대에 도입될 기회가 주어졌다. 국내 유일의 완제기 생산업체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세계 최대 방산기업 록히드마틴과 손잡고 미 해군의 차세대 고등훈련기(UJTS·Undergraduate Jet Training System) 사업 입찰에 나선다. 사업 규모는 40억 달러(10조 원)로 단순한 항공기 도입을 넘어 미군 시뮬레이터·교육 시스템 통합까지 포함하는 프로젝트다.
최대 경쟁사인 보잉이 T-7A에 안전 문제 등이 불거지며 납기일이 2023년에서 2026년으로 늦어지고 최근 파업 사태까지 악재가 연이어 터지면서 수주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이번 사업이 성사될 경우 천조국 세계 최강 군사력의 미군이 한국 전투기를 처음으로 도입하는 기념비적 사례로 K방산의 새 지평이 열리는 엄청난 수주가 될 것이다.
방산업계에 따르면 미 해군은 고등훈련기(UJTS) 도입 사업의 입찰 제안요청서(RFP)를 오는 12월 접수한다. 총 145~220기의 고등훈련기를 도입하는 초대형 사업이다. 계약을 맺는 업체는 연간 훈련기 25기 정도를 미 해군에 공급하게 된다. 미 해군은 내년 심사를 통해 우선협상자를 정한 후 2027년 1월 최종 공급자를 선정한다.
KAI는 2018년에 이어 이번에도 록히드마틴과 손잡고 T-50 골든이글의 파생형인 미 해군 맞춤형 ‘TF-50N’ 기종으로 도전장을 냈다. TF-50N은 KAI의 T-50 골든이글 계열을 기반으로 한 기종이다. 미 해군의 사업 요구 사항에 맞춰 개량됐다. 현재 한국 공군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이라크, 필리핀 등에서 이미 200여 대가 운용되면 입증된 안정성과 효율성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KAI 파트너로 참여하는 록히드마틴은 “TF-50N이 미 해군의 항공 훈련 요구를 완벽히 충족할 저위험·확장 가능 솔루션”이라며 “TF-50N의 운용 경험과 비용 효율성은 경쟁 모델 대비 20% 이상 우위에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2018년 약 18조원 규모의 미 공군 훈련기 사업에서 KAI-록히드마틴 연합을 꺾은 최대 라이벌인 보잉은 이번에도 스웨덴 방산업체 사브와 손잡고 ‘T-7B’로 입찰에 나선다. 그러나 보잉은 당초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지만 최근 악재가 잇따르며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당장 미 공군 훈련기 사업에 최종 선정됐던 ‘T-7A’는 각종 안전 문제가 발생해 납기일이 2023년에서 2026년으로 미뤄져 신뢰도에 타격을 입었다. 최근에는 보잉 엔지니어들이 두 달째 파업을 이어가며 임금 40~50% 인상을 요구하고 있어 생산비용 상승 우려까지 커졌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미 해군은 공군이 보잉의 T-7A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후속인 T-7B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다”며 “보잉 엔지니어들이 한 달 이상 장기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도 부정적 요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보잉 엔지니어들은 임금 40~50% 인상을 요구하는데 파업이 종료되더라도 생산 비용이 그만큼 뛸 수밖에 없어 가격 경쟁력에서 불리해질 수 있는 것이다. 보잉은 2018년 저가 전략으로 미 공군 훈련기 사업 수주에 성공한 바 있다.
또 다른 경쟁자인 글로벌 방산기업 레오나르도社도 있다. KAI-록히드마틴 연합에 비해 수출 실적과 해외 운용 실적이 부족하지만 경계 대상이다. 제안 기종은 미 해군용 ‘M-346’을 기반으로 제안된 ‘Beechcraft M-346N’(일명 M-346N ITS)이다.
미 비치크래프트社와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社가 협력 설계한 M-346N은 이탈리아 레오나르도의 검증된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미 해군의 항공모함 착륙 요구사항 변화(2025 RFI 수정)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형 개량이 늦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KAI는 이번에 반드시 수주하기 위해 미 해군 ‘맞춤형’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미 해군이 보잉에 불만을 품은 사항을 조사해 이와 관련한 기술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인 신체에 맞게 내부 좌석과 실내 공간 등도 변경했다. 덕분에 대화면 디스플레이를 갖춘 조종석과 공중급유장치, 가상훈련(ET) 기능 등을 추가해 F-22, F-35 조종사의 훈련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설계 됐다.
만약 이번 사업 수주에 성공하면 미국 시장 진출이라는 상징성과 상당한 파급력도 함께 얻게 된다. 미군이 채택한 항공기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과 제3국 수출에서도 신뢰도를 보장하는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정부 차원에서도 수주를 위한 적극 지원을 시사하고 있다. 석종건 방위사업청장은 최근 워싱턴DC에서 열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방위사업청(DAPA) 콘퍼런스’에서 K방산을 알리면서 “이번 사업은 기업 차원을 넘어 한미 안보 협력의 상징”이라며 정부 지원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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