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요광장에 새 대통령의 연설을 듣겠다며 10만여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은 대통령이 아니라 영부인인 에바 페론에게 쏠려 있었다. 에바는 남편 후안 페론과 함께 붉은 벽돌로 지어진 대통령궁 2층 베란다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동자들의 단결과 지지를 호소했다. 여배우 출신의 에바는 아름다운 외모와 확신에 찬 연설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집권 이후 노동자의 처우 개선과 여성의 지위 향상, 임금 인상 등 파격적인 정책을 펼쳐 ‘국모’라는 칭송까지 들었다. 그러나 선심성 복지정책에 따른 폐해는 아르헨티나에 포퓰리즘의 대명사인 ‘페로니즘’이라는 멍에를 씌우고 말았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오랫동안 노동자와 서민층을 기반으로 하는 페론주의에 젖어 있었다. 역대 정부마다 페로니즘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자본 통제를 실시하고 국영화에 열을 올렸다. 해마다 연금을 대폭 인상하는가 하면 전기도 공짜로 공급했다. 페론이 죽어도 페로니즘 신앙은 여전히 아르헨티나를 망령처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다.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나라 곳간이 텅텅 비고 물가는 폭등했다.
2001년 말 아르헨티나 도심에서 수천 명의 시위대가 상점에 무단 침입해 닥치는 대로 생필품을 약탈하는 폭동 사태가 빚어졌다. 페소화 가치가 폭락하고 은행예금마저 마음대로 쓰지 못하자 참다못한 사람들이 폭도로 돌변한 것이다. 결국 정부는 비상사태와 함께 대외채무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했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522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궁지에 몰리게 됐다.
최근 통화가치가 급락한 아르헨티나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구제금융은) 더 강한 경제 성장과 발전을 도울 것이며 과거에 겪었던 위기를 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호소했다. 2015년 집권한 마크리 정부는 페로니즘과의 결별을 선언했지만 보조금 삭감과 공공요금 인상에 반발하는 여론에 밀려 개혁노선을 점차 완화해야만 했다. 페로니즘이 남긴 무분별한 복지라는 위험한 유산이 한때 초강대국을 자랑하던 아르헨티나를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셈이다. 아르헨티나와 IMF의 질기고 질긴 악연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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