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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김병기 '돌아오다']자유롭게 그은 검은 선...白壽에도 꿈틀대는 화가의 열정

'한국 서양화가의 효시'로 불린 부친 재능 물려받아

열여섯살때 모친이 사준 도구로 유화 그리기 시작

추상미술 몰두하다 美 정착후 형상으로 변화 추구

대작 '산악도'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기운 느껴져

102세 예술원 최고령 화가로 지금도 왕성한 활동

김병기 ‘돌아오다(B Returning B)’ 2015년, 캔버스에 유화, 162x130cm /사진제공=가나아트




“바람이 일어난다!…살아야겠다!”

1947년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서울로 월남하던 화가 김병기(102)는 폴 발레리(1871~1945)의 ‘해변의 묘지’ 시구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 세기를 관통해 산 현역 최고령의 화가는 49년의 한국 생활 후 미국으로 갔고 미국에서 딱 49년을 살고서 영구귀국을 결심하고 연 2015년 개인전의 부제로 ‘바람이 일어나다’를 택했다. 발레리의 프랑스어 시도 국내에 처음 번역본으로 소개될 때는 ‘바람이 분다’ 식의 표현이 많았지만 ‘부는 상태’ 보다는 바람이 이는 순간의 역동성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김병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기상을 물려받은 김병기의 고향 평양식 표현으로는 ‘바람이 일어난다’가 더 적확했다.

백수(白壽)의 화가가 그린 ‘돌아오다’에는 바로 그 바람이 분다. 자유롭게 그은 검은 선들의 움직임에서 바람이 인다. 100세의 노화가가 그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청춘의 열정이 꿈틀댄다. 맑은 하늘색을 배경으로, 자를 대고 그었나 싶을 정도로 곧게 뻗은 선 사이로 비집고 나온 검은 선은 이내 바람에 나부끼는 풀(草)로 보인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며 앓는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씹어삼키는 풀. 시인 김수영(1921~1968)의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더라도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났고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 바로 그 ‘풀’처럼.

김병기 ‘광야’ 1982년작.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근현대사를 관통한 화가는 일제 치하에서도, 이념 대립의 틈바구니에서도, 심지어 전쟁통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얻은 안온한 작가의 길을 버리고 미국으로 갔고 그 치열한 뉴욕에서도 살아남았다. 미국의 벌판을 가로질러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그의 눈은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로 향했다. 김병기는 무리지어 살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그 풀이 “마치 한국인 같았다”고 했다. “민족을 생각하면 괜히 눈물이 났다. 아내가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가면 나는 차에서 기다리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눈물이 바람처럼 자꾸 왔다.”

1916년 평양출생. 용띠 김병기는 지난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탄생100주년 기념전’이 열린 이중섭·유영국·변월룡과 동갑내기다. 그중에서도 이중섭과는 고향도 같고 평양 종로보통학교 6년 같은 반 단짝이었다. 둘 다 부잣집 아들이라는 것까지 똑같다. 김병기의 집안은 대대로 만석꾼으로 불린 평양갑부였다. 부자였을 뿐 아니라 정3품의 벼슬을 지낸 그의 할아버지는 종로보통학교 신축공사 때 가장 큰 후원금을 쾌척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부잣집 아들’로 화가가 된 것은 아버지 김찬영(1889~1960)이 먼저였다.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김찬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김관호와 함께 근대기 한국을 깨운 ‘서양화가의 효시’로 불린다. ‘배따라기’와 ‘감자’의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이 자서전에서 부잣집 난봉꾼 ‘K’로 표현했던 이가 바로 김찬영이다. 열 세살에 조혼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살가운 정은 없었던 모양이다. “서울에서 딴살림을 차려” 집에 없던 아버지는 “그립기도 하고 밉기도 한 존재”였다. 반면 고향에서 맏며느리로 아이들을 키우며 버틴 어머니는 교회에서 위안을 얻었다. 분출과 절제 사이의 균형감각은 많이 달랐던 부모 사이에서 어려서부터 익혔다.



절친한 벗 이중섭은 일찍 죽어 신화가 됐다.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 행려병자로 세상을 떠난 친구의 시신을 찾아와 수습한 이가 바로 김병기다. 친구보다 두배도 더 살았고 지금도 그림을 그리는 김병기는 ‘역사의 산증인’이 됐다. 이중섭은 종종 김병기의 집에 놀러 왔고 둘은 김찬영의 화구를 탐색하고 영국의 미술잡지 ‘스튜디오’를 뒤지곤 했다. 김병기는 열여섯 살일 때 어머니가 미술도구와 캔버스를 사준 것을 계기로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화가였으니 재능과 감각은 이미 물려받은 것이었고, ‘청자 수집의 최고 컬렉션’이라는 소리를 들은 아버지의 고미술 수집품이 안목을 높였다. 화가가 되겠다는 그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모교인 도쿄미술학교로 가라고 권하며 “일본에서 부족하면 파리로 가라”면서 응원을 보냈다. 일본에서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다니면서 추상미술을 접했고 막내급이지만 서양미술사와 이론의 체계를 다졌다. ‘꺽다리’ 김환기를 만난 것도 이 연구소에서였다. 숙소를 찾던 시인 이상(1910~1937)을 하숙집 자신의 방에 묵게 하며 침대까지 내줬건만 다음날 아침 “빗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김병기 ‘센 강은 흐르고’ 1992년작.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일본의 패전과 조국의 광복은 평양의 집에서 라디오로 들었다. 김병기는 해방과 함께 탄생한 ‘평양예술문화협회’의 총무를 맡아 예술가가 구현할 시대정신을 고민했다. 그런 김병기와 동료들을, 통행금지 시간에 불러내 만난 이가 바로 김일성이었다. 그때만 해도 덜 알려졌던 ‘김일성 장군’은 “예술인 여러분께서 나를 선전해주시오”라고 요청했다. 강서고분 일대의 땅을 토지개혁 명분 하에 몰수당하며 회의가 들기도 했고 소신있는 발언이 ‘반동’으로 의심받기 시작했던 김병기는 결국 월남을 택했다. 나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950년 9월28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을 뒤따라 고향에 다시 갔으나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잇자고 제안해 밤새 피난민들과 복구에 나서 다리를 다시 건넜다. 서울 집에 도착해 가족과 오른 피난선의 갑판에서 장욱진을 만났고, 잠시 들른 제주도에 내렸더라면 이중섭 가족과 같은 피난살이를 했을테지만 부산까지 갔다. 부산에서는 박고석과 시계장사도 해보고 달러장사도 하는 등 고달픈 삶이었지만 종군화가단 조직에 앞장서 예술가의 책무를 실천했다. 휴전 직후 서울대 미대에서 현대미술 이론을 강의하고 새로 생긴 서울예고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이중섭과 출발지점은 같았으나 일찍 끊어진 친구의 삶은 ‘가지 않은 길’처럼 동경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김병기는 스스로 잊힘을 택했다. 미국으로 가버렸다. 한국미술협회 제3대 이사장이 된 그는 당연직으로 19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가 됐고 여기서 한국인 최초로 국제미술행사의 심사위원에 뽑혔다. 바넷 뉴먼, 프랭크 스텔라, 알베르토 자코메티, 장 팅겔리 등의 거장을 그가 심사했다. 이응노가 그해 상파울루비엔날레 명예상을 수상했다. 미술계 실세 중 실세였다. 하지만 사무실로 출근하는 생활은 화가를 견딜 수 없게 했다. 미국에서 한국인도 없는 뉴욕주 새러토가에서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고독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간 추상미술에 몰두했던 김병기는 “비형상에서 형상으로”의 변화를 추구했다. 보통은 형상있는 ‘구상화’에서 형상없는 ‘추상화’로 옮겨가지만 그는 반대였다. 뉴욕 정착 초반에 그린 대작 ‘산악도’는 어릴 적 어머니와 유람 다니던 금강산을 그리워 한 까닭인지 ‘몽유도원도’의 기운이 느껴진다. 기법상으로는 선과 면뿐인 추상화지만 그 안에는 산과 들이 보였고 벌거벗은 인물과 깨뜨리고 싶은 정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림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곧은 직선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건축회사에서 제도 일을 돕던 버릇이 화풍으로 옮겨온 것이다. 미국에서 은둔하는 그를 재발견한 이는 미술사학자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다. 윤 교수는 1986년 처음 김병기를 찾아가 이름 한 자, 숫자 하나까지 정확한 그의 기억을 구술채록했고 가나화랑에서의 전시를 주선했다. 최근에는 ‘102살 현역 화가 김병기의 문화예술 비사’라는 부제로 ‘백년을 그리다’를 출간했다.

조국 땅을 다시 밟은 김병기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오마주하여 ‘인왕제색’(1988년)을 그리면서 붉은색 고구려의 기상까지 담았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 이어 지난해 대한민국예술원의 최고령 신입 회원이 됐다. 그는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이 마련해 준 평창동 작업실에서 지금도 그림을 그린다. 아침이면 손수 커피와 토스트를 챙기고, 그림이 잘 안 풀릴 때면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죽은 옛사람을 묻지만 정작 화가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의 그림이다. 그의 그림 속에 부는 바람이 영원할 것만 같다. 돌고 돌아 백 년을 산 노화가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있을 것 같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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