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라디오가 청소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적이 있었다. 라디오는 여러 경연 대회를 통해 스타 가수들을 배출하며 대중문화 전반을 좌우하기도 했다. MBC 표준FM ‘별이 빛나는 밤에’(별밤)를 진행하는 가수 이문세는 ‘밤의 문교부 장관’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제 라디오는 전성기를 지나 올드미디어가 됐다. TV를 지나 팟캐스트·유튜브가 대세가 된 세상이다.
하지만 라디오도 감성과 소통이라는 자기만의 매력을 무기로 삼아 과거 영광을 되찾기 위해 변신을 시도 중이다. 멀어진 10~20대들을 잡기 위해 아이돌 가수들을 DJ로 내세우는가 하면 영상 시대에 맞춰 ‘보이는 라디오’까지 선보이고 있다.
◇젊은 DJ 내세워 청소년 사로잡는다= 과거 애청자들이 라디오의 매력에 처음 빠지게 된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오빠’나 ‘누나’를 매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라디오는 짝사랑하는 스타의 소탈하고 진솔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였다. 최근 라디오 방송사들도 이 부분에 착안해 아이돌 가수 등 젊은 DJ들을 적극 기용하고 있다. 젊은 스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빠지면 다른 라디오 방송도 들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KBS 쿨 FM의 ‘볼륨을 높여요’는 1999년생인 악동뮤지션의 수현이 DJ로 활동 중이다. 그동안 ‘볼륨을 높여요’는 이본, 유인나 등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언니’들이 DJ를 맡아왔다. 수현은 지난해 DJ를 맡으면서 “아직 어리기 때문에 청취자들에게 조언보다는 공감을 통한 힐링을 전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 밖에도 블락비의 멤버인 박경이 4월부터 새롭게 MBC FM4U ‘꿈꾸는 라디오’의 DJ로 합류했다. 인피니트의 멤버 성종은 EBS FM ‘미드나잇 블랙’을 진행하고 있다.
MBC 표준FM ‘아이돌 라디오’의 경우 비투비의 멤버 정일훈이 DJ를 맡아 매일 10~20대가 열광하는 아이돌을 소개한다. 이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보다 10~20대의 유입 비중이 높다. 라디오는 연령별 청취율이 정확하게 집계되지 않기 때문에 10~20대 비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아이돌 라디오’의 경우 일주일 가운데 닷새는 네이버 브이(V) 라이브(live)로 영상 방송을 진행하며 실시간 접속자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방탄소년단의 동생 그룹으로 불리는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가 출연한 방송의 동시간대 접속자가 40만 명에 육박하기도 했다. 26대 ‘별밤지기’인 산들(본명 이정환·27)과 신성훈(40) PD는 “청소년 친구들의 마음을 어떻게 돌리느냐가 DJ와 제작진들의 가장 큰 숙제”라고 말했다.
◇“라디오를 볼 수 있다고”= 영상 시대 대응을 위해서는 2000년대 초반 무렵부터 ‘보이는 라디오’를 선보이고 있다. DJ와 게스트의 실시간 모습을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영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유명 게스트가 초대되면 네이버 브이 라이브, 유튜브 등 다른 플랫폼에서 실시간으로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MBC 표준 FM ‘아이돌 라디오’의 경우 네이버 브이 라이브와 중국 대표 소셜미디어인 웨이보와 힘을 합쳐 주 5일 영상 방송을 선보인다. 오후 9시에 먼저 영상을 통해서 선보인 후 재편집해 오전 1시 정규 라디오 방송시간에 송출하는 방식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보이는 라디오’나 ‘네이버 브이 라이브’, ‘유튜브’를 통해 라디오를 즐기는 사람들은 청취자인지, 시청자인지 애매하다”며 “점점 오디오 매체와 영상 매체의 경계가 사라지고 통합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부분의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공식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을 개설해 청취자들에게 적극 다가가고 있다. 매일매일 방송되는 라디오의 특성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소식을 전하고 이벤트를 여는 등 청취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도 눈에 띈다. MBC는 지난해 ‘봉춘라디오’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소개된 사연을 카카오톡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등 온라인에 맞는 콘텐츠로 변신시켰다. MBC 라디오국에 있는 직원 중 노래 잘하는 직원을 소개하는 ‘직원 라이브’ 같은 콘텐츠도 선보이고 있다.
◇감성과 실시간 소통은 여전히 라디오의 힘= 이처럼 다양한 변신을 시도 중이지만 여전히 라디오만이 가진 ‘힘’이 있다. 청취자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 같은 따뜻한 매체이고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50주년을 맞는 MBC 표준FM ‘산들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전국의 청취자에게 직접 다가가는 오픈 스튜디오를 통해 라디오의 감성을 되살렸다.
지난달 진행된 전국투어 야외 생방송 ‘1320km 프로젝트: 별밤로드 끝까지 간다’는 서울 상암동을 시작으로 8일간 대전·전주·광주·부산·대구·춘천을 돌았다. 매일 밤 현지에서 생방송으로 약 1만 2,000여 명의 청취자와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1969년 3월 17일 처음 방송된 ‘별밤’은 이수만·이문세·이적·옥주현·백지영·강타 등 진행자들이 거쳐 가며 ‘대한민국 라디오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프로그램이다. 또 교실콘서트를 통해 ‘별밤’과 함께 세월을 보낸 청취자들은 물론 지금의 10대 청소년들에게 찾아가는 기획도 시작했다.
청소년들의 롤 모델이 될 만한 명사들과 인기 스타들이 함께 교실을 찾아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이다. 신성훈 PD는 “청소년들이 유튜브, SNS 등 뉴미디어에 많이 지쳐있더라”며 “별밤에 들어오는 사연 중 10대 친구들이 보내는 게 절반을 넘어섰고 라디오만이 주는 감성이 다시 청소년들에게 먹혀들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별밤’처럼 직접 찾아가지 않더라도 라디오는 거의 매일 생방송으로 DJ를 만날 수 있다. 이 때문에 청취자가 더 가깝게 느껴지게 되는 매력이 있다. 매일 방송을 하다 보니 DJ도 편하고 진솔한 모습을 보여준다. 청취자들이 ‘공부하기 싫다’, ‘우울하다’와 같은 소소한 고민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영상 매체와 달리 라디오는 운전하거나 공부를 할 때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유일하게 청각 하나만을 가지고도 청취자와 소통하고 즐길 수 있다. 산들은 “라디오는 듣다 보면 라디오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김현진기자 stari@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