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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스위스 동맹, 험난했던 독립의 길

1388년 네펠스 전투서 대승

스위스 네펠스에 서 있는 네펠스전투 기념비.




1388년 4월9일, 알프스 동부의 글라루스주 네펠스 마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대가 쳐들어왔다. 독립 기운을 밟기 위해서다. 합스부르크의 압제에서 벗어나자며 ‘숲속의 주(canton)’들이 1291년 동맹을 맺은 지 97년여. 스위스 동맹은 슈비츠(스위스라는 국명이 여기서 나왔다)가 주도한 모르가르텐 전투(1315년)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전투에서 언제나 병력의 열세를 딛고 이겼다. 특히 1386년 젬파하 전투에서는 합스부르크의 군주인 레오폴드 3세까지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며 위세를 떨쳤다.

합스부르크는 싸움을 피하고 싶었지만 젬파하 전투에 고무된 글라루스주가 독립과 동맹 합류를 선언하자 다시 병력을 보냈다. 공격 측은 승리를 믿었다. 합스부르크는 기사 1,500명을 포함한 6,500명의 정예병인 반면 글라루스주는 슈비츠와 우리주가 보낸 원병을 합해도 400명에 못 미쳤다. 1대16을 넘는 병력의 열세인 스위스 동맹군은 고지로 숨었다. 합스부르크군이 약탈에 정신이 팔린 사이 마침 눈과 안개가 끼었을 때 동맹군이 역공에 나섰다. 결과는 동맹의 대승. 54명의 전사자만 내고 합스부르크 장병 1,700명을 죽였다.



합스부르크는 방어를 넘어 공세로 전환하려는 스위스 동맹에 손을 내밀었다. 네펠스 전투 1년 뒤에 동맹과 7년간 휴전 협약을 맺었다. 독립을 암묵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스위스 동맹은 30년 종교전쟁의 종결과 신국제질서 확립을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에서 국제적으로도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한 비엔나 조약(1815년)에서는 모두가 인정하는 영세중립국으로 자리 잡았다. 가난하고 험한 산골에 살아도 억압받지 않겠다는 스위스인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자존심이 작지만 강한 상승(常勝)의 군대와 독립, 오늘날의 번영을 이끌었다.

스위스 동맹의 투쟁은 유럽사에도 무수한 영향을 끼쳤다. 기사 중심의 고비용 군대가 농부 출신의 저비용 밀집진형에 늘 깨졌다는 경험은 네덜란드와 스페인·스웨덴·프로이센의 군제 개혁으로 이어졌다. 국민국가의 출현도 앞당겼다. 분열된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하며 시민군 창설에 전력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도 동맹을 눈여겨봤다. “무장한 예언가는 모두 성공한 반면 무장하지 않은 예언가는 모두 실패했다”는 말을 남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과 ‘전술론’에서 스위스 독립전쟁기의 장창병을 시민병의 모범으로 꼽았다. 고소득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는 지금도 전쟁에 대비하는 나라로 유명하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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