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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일본 내란 종결한 쇼군의 항복

1868년 에도 무혈개성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쓰 가이슈가 항복 협상을 벌인 장소에 세워진 기념비.




1868년 4월11일 오전3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에도성을 나왔다. 목적지는 근신지인 미토. 존왕파와 268년간 권력을 지켜온 막부 간의 일본 권력을 둘러싼 내전인 보신(戊辰) 전쟁도 사실상 끝났다. 전세는 기울었어도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던 요시노부는 끝까지 항전하자는 일부 가신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순순히 에도성을 내줬다. 15대 동안 이어져 온 쇼군가의 통치도 종언을 맞았다. ‘에도 무혈개성(無血開城)’으로 불리는 요시노부의 선택은 100만명의 에도 시민을 전화의 참상에서 구해냈다.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고 칭송받는 요시노부는 그렇게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유신 지사들의 역할도 컸다. 메이지 신정부를 대표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막부 측 대표인 가쓰 가이슈는 두 차례의 협상에서 극적인 합의를 이뤘다. 합의의 골자는 막부의 항복과 관대한 처벌. 고향에서 근신하라는 명령을 받은 요시노부의 고쿠다카(쌀 생산량으로 표시되는 연간 수입)는 800만석에서 70만석으로 깎였다. 가신들 역시 일정 기간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 막부군 함대와 쇼군의 방계 가문이 지배하던 아이즈번 등 일부가 저항했어도 근대화를 향해 달려가던 일본은 내전을 최단 시간과 최소의 희생으로 마무리했다.



개항(1854년) 13년 만에 내분과 권력 경쟁을 끝낸 일본은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개항 이래 왕을 받들고 막부를 내쫓자던 일부 웅번들은 어떻게 뜻을 이뤘을까. 사쓰마번의 경제력 없이는 설명이 어렵다. 도쿠가와 쇼군가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진다는 의심을 받으면서도 사쓰마는 수백 년 동안 내실을 다졌다. 1609년에는 막부의 명을 받아 홀로 오키나와를 점령한 적도 있다. 개항 전부터 영어로 일기를 쓰던 번주(大名·다이묘)는 공업단지 집성관에 근대식 용광로와 대포·유리 공장, 증기금물세공장 등을 세웠다. 사무라이 중심의 막부군은 사쓰마번 등이 영국제 소총과 대포로 무장시킨 농민 출신 병사들에게 무너졌다.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요시노부는 낙향한 이래 1913년 76세로 죽을 때까지 사냥과 사진 촬영, 바둑과 낚시·사이클 등을 즐기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요시노부의 항복을 이끌어냈지만 반란 끝에 자결로 생을 마감한 사이고와 대조적이다. 사이고와 협상했던 가쓰는 외침론을 들어 요시노부를 설득했다. “일본이 분열돼 싸우면 영국과 프랑스·러시아가 침략해 올 것입니다. 중국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힘을 합쳐야 합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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