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년 6월5일 네덜란드 남부의 전략요충지 브레다. 스페인 군대에 맞서 9개월 동안 버텨온 네덜란드군이 성문을 열었다. 네덜란드 각지는 물론 영국에서도 지원병력을 보냈지만 역부족.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항복의 순간을 화폭에 담았다. 펠리페 4세 치하의 궁정화가였던 그가 남긴 유일한 역사화인 ‘브레다의 항복’은 전쟁화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패장은 승자에게 성의 열쇠를 건네고 승자 측은 엄정한 군기를 보이면서도 자애롭게 항복 진영을 맞는다.
벨라스케스는 화면의 좌우로 두 진영을 나눴다. 승자인 스페인군의 창대가 하늘을 찌를 것 같다. 반면 네덜란드군에서는 질서가 보이지 않는다. 화가의 그림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할까. 항복 날짜가 분명하고 정황이 비슷할 뿐이다. 항복 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허구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항복에 앞서 양측은 격렬하게 싸웠다. 브레다 수비대 7,000명에 지원병(영국군 포함) 1만4,000명 중 1만명이 죽거나 다쳤다. 스페인군은 넓고 깊은 해자 겸 운하로 둘러쌓인 브레다성에 8만명을 투입해 3,000명의 희생자를 내고서야 겨우 이겼다.
스페인이 물과 식량 공급로를 차단하는 바람에 아사 직전에 항복하면서 네덜란드군은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네덜란드 군대의 질서 있는 후퇴와 브레다성 주민에 대한 약탈 금지.’ 스페인 군대가 약속을 지켰는지 왕실의 알현실에 넣을 그림을 의뢰받은 화가는 스페인의 관대함을 그려넣었다. 네덜란드는 브레다성 전투에서는 졌어도 80년(1568~1648년)에 이르는 끈질긴 저항 끝에 결국 독립을 따냈다. 전쟁을 치르면서도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 등을 통해 세계와 교역하며 부를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스페인은 ‘한 줌도 안 되는 거지 떼’인 네덜란드 독립군을 상대하기 위해 남미 식민지에서 보내온 막대한 금과 은을 탕진하며 세계사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기술했듯이 ‘근면으로 축적한 부(네덜란드)’가 ‘약탈한 자본(스페인)’을 누른 셈이다. 예술의 힘 덕분일까. 화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밀리고 있는 현실을 스페인이 아량을 베푸는 것으로 포장한 자기 왜곡이었으나 아직도 위대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오늘날 네덜란드의 경제적 여유도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예술로만 볼 수 있는 힘의 바탕인지도 모른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지만 실존이야말로 기록에도 앞선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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