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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에 찬 인간이여, 잠시 쉬어가시게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개관展 '한국 현대조각의 단면'

'근대조각 효시' 김복진 시점으로

한국근현대조각 100년 역사 정리

백남준·이수경·배형경 등 63명

스타작가 대표작 25일까지 전시

배형경 ‘하늘과 대지 사이에 인간이 있다’




하늘과 땅, 그 사이를 인간이 서성이고 있다. 태초부터 사람은 하늘의 순리와 세속의 정욕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왔으니, 어쩌면 그게 삶이다. 숱한 철학자들의 치열한 고뇌가 거친 표면의 청동 인물상들을 가로지른다. 지난달 개관한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 놓인 중견 조각가 배형경의 ‘하늘과 대지 사이에 인간이 있다’이다. 머리는 하늘을 향하지만 발은 땅에서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의 숙명 앞에 숙연해지는 작품이다. 고민하던 어떤 이는 벽에 머리를 박은 채 기대 서 있다. 고개 숙인 자세지만 결코 체념한 것은 아니다. 하늘의 뜻을 따르되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눈을 떼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반성적 태도다.

지난 2011년 공론화를 시작해 2016년 첫 삽을 떠 완공된 이 박물관 자리는 조선 후기에 ‘서소문 밖 네거리’로 불렸다. 일찍이 큰 시장이 형성돼 항상 왁자지껄했다. 당시 국가는 지배 논리에 반하는 행동을 한 이들을 벌하는 형장으로 이곳을 택했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좋다는 이유였다. 초기 천주교가 박해받던 시절, 성인 103명 중 44명과 복자 124명 중 27명이 이곳에서 순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신앙과 안위 사이에서 고뇌하던 순교자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배형경의 조각은 마치 이곳 땅에서 발굴해 낸, 처음부터 이곳에 있던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깊은 공감이거나.

배형경 ‘하늘과 대지 사이에 인간이 있다’


배형경 ‘하늘과 대지 사이에 인간이 있다’ 세부모습.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개관전으로 ‘한국 근현대조각 100주년:한국 현대조각의 단면’이 오는 25일까지 열린다. 근대조각가 9명의 아카이브·영상과 함께 현대조각가 63명의 대표작을 선보인 유례없는 조각전이다. 김영호 중앙대 교수가 김세중미술관에서 가톨릭종교조각전시를 기획한 인연으로 개관전을 맡아 1년여 동안 준비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김복진(1901~1940)이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한 1920년을 시점으로 잡으면 서구의 근대 구상조각이 유입된 지 100년이 된다”면서 “1950년대 후반의 비구상·추상조각부터 1970년대 이후의 설치작품, 최근의 신형상까지 아우르며 근대사의 흔적 위에 동시대적 생명력이 깃들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백남준 ‘율곡’


종교적 의미보다는 한국 조각사의 흐름에 초점이 맞춰진 전시다.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2번이나 초청된 작가 이불의 ‘사이보그’는 여성의 한계, 몸의 제약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응축했다. 깨진 도자기 파편을 금(金)으로 이어붙인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기’와 낡은 나무에 투박한 손길로 사람들을 새기고 그린 윤석남의 ‘어머니2-딸과 아들’, 완강한 그리스 조각 같은 여인상을 쉽게 녹아버릴 수 있는 비누로 빚어 만든 신미경의 ‘트랜스레이션(Translation)’ 등의 작품은 전통과 현대의 소통을 이야기한다. 조선의 철학자 율곡 이이를 주인공으로 한 백남준의 TV로봇 ‘율곡’은 양반다리로 앉아 안테나로 된 양손을 뻗어 명상 중이다. 세계 무대를 누비는 서도호의 2006년작 ‘유니폼/들:자화상/들:나의 39년 인생’도 오랜만에 전시됐다. 작가 자신이 입었던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교복과 교련복, 군복 등 유니폼을 나란히 걸어 제복으로 인생을 되짚어 본 ‘자화상’이다.

서도호 ‘유니폼/들:자화상/들:나의 39년 인생’


서도호 ‘유니폼/들:자화상/들:나의 39년 인생’


한 층 내려간 지하 1층 전시장에는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의 ‘작품 68-1’을 비롯해 김정숙·윤영자 등의 작품을 통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로 넘어가는 현대조각의 시작이 펼쳐진다. 청동 조각이 갖는 선(線)의 미학을 추출해 낸 송영수, 전후 세대의 생(生)의 의지를 표현한 최만린, 담백한 서정성의 최종태 작품을 비롯해 최근 대한민국예술원 신입회원이 된 최의순의 ‘수난자 머리Ⅱ’도 볼 수 있다. 문신·정관모·엄태정·박종배·전국광 등 대표급 원로작가들이 총출동했고 안규철·윤영석·김종구·성동훈·이용덕 등 중견작가들은 현대조각을 한층 발전시켜 독특한 소재, 개념미술의 형태로 확장시켰다. 요절한 조각가 구본주와 류인의 작품은 여전히 살아 울림을 전하며, 권대훈·이환권·권오상·최수앙·이동욱 등 40대의 젊은 작가들은 한국 조각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투명한 실에 매달려 천장에 걸린 수백 개의 숯들은 박선기의 작품이다.

최만린의 ‘이브61-3’(왼쪽부터)와 최의순의 ‘수난자 머리’, 오종욱의 ‘위증인 no.2’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개관전 전경.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개관전 전경.


이승택 ‘묶인 돌’


박물관 도서관 앞에 놓인 이승택의 ‘묶인 돌’을 순교자처럼 처연하다. 이처럼 곳곳에 작품들이 숨어있다. 박물관 내 야외공간인 하늘광장에 전시된 정현의 ‘서 있는 사람들’은 지난 2016년 프랑스 파리 팔레루아얄정원 전시로 화제를 모았던 바로 그 작품이다. 철도 침목 등 깔리고 밟혔던 낡은 나무를 일으켜 세워놓은 작품 곁에서, 하늘을 보며 희망을 얘기할 수 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내 하늘정원에 설치된 조각가 정현의 ‘서 있는 사람들’


김종영 ‘작품 68-1’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내 하늘정원에 설치된 조각가 정현의 ‘서 있는 사람들’


이용덕 ‘올림픽의 매력’


윤석남 ‘어머니2-딸과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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