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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911년 조선은행법 시행

멋대로 과거·현재 뒤섞은 일제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의 모습. /위키피디아




1911년 8월1일 ‘조선은행법’이 시행됐다. 골자는 ‘(옛)한국은행’의 ‘조선은행’으로의 전환. 나라의 명줄이 다해가던 1909년 11월 설립된 한국은행은 이름만 대한제국에서 따왔을 뿐 일본이 주도하고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은행이었다. 고종은 진작부터 중앙은행을 세우려 했다. 일국의 국모가 일본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된 직후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아관파천)한 고종은 경제발전을 위해 중앙은행을 세우고 금본위제도를 시행할 마음을 굳혔다.

고종은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대한제국을 출범시키고 러시아의 출자를 받아 정부의 은행 역할을 할 ‘한아(韓俄)은행’을 1898년 세운 데 이어 대한중앙은행 설립도 밀고 나갔다. 금본위제 도입을 위한 화폐 조례를 마련하고 중앙은행 조례와 태환금권 조례를 만들었다. 일본은 극구 반대했다. ‘복잡한 은행업을 이해할 조선인이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일본의 민간 상업은행인 제일은행이 갖고 있던 변칙적 화폐 발행권을 포함한 기득권이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반대로 고종의 계획은 계속 늦어졌다.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이 확고해지자 일본은 태도를 바꿨다.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1909년 ‘(옛)한국은행’을 세웠다. 대장성 허가로 설립된 이 은행의 주식 공모와 창립총회도 모두 일본에서 이뤄졌다. 1만명이 넘는 주주의 98%가 일본인. 조선은행으로 개칭하는 조선은행법을 일제는 (옛)한국은행 설립 시기로 소급 적용했다. 조선은행은 식민지 조선이 아니라 일제의 대륙 침략 도구로 쓰였다. 중국에 친일 정권을 세우기 위한 대출에 동원되고 조선 내 대출보다 만주 지역 대출이 더 많았다.

조선은행은 겉으로는 화려한 국제 네트워크를 지닌 식민지 중앙은행으로 성장하는 것 같았지만 납입자본금을 웃도는 거액의 부실로 속이 곯았다. 결국 일본에서 폐지론이 일고 자본금까지 깎였다. 내부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았지만 조선인 행원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일부 행원은 알량한 권력을 휘둘러 지탄받았다.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에 조선은행권 수송 정보를 흘려 탈취를 도운 전홍섭 선생 같은 분도 있었지만 극히 드물었다. 망국 전후 중앙은행의 슬픈 역사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설립을 반대하다 찬성으로 돌아서고 법을 소급 적용하며 편리한 대로 과거와 현재를 뒤섞던 일본의 행태는 옛날 얘기일 뿐일까. 전홍섭 선생을 일제에 밀고한 변절자의 후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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