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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663년 백촌강 전투

倭, 일본으로 재탄생

[오늘의 경제소사] 663년 백촌강 전투
백촌강 전투 묘사도. /나무위키

663년 8월27일 백촌강(白村江) 하구. 백제부흥군과 왜의 지원군이 신라·당(唐) 연합군과 맞붙었다. 이틀 동안 싸움의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초전부터 제·왜(濟·倭) 연합군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삼국사기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됐다’고 전한다. 1,356년 전 오늘 백촌강 전투는 동아시아 5개국의 운명을 갈랐다. 백제 부흥운동이 끝나고 고구려 멸망으로 이어졌으며 신라는 당과 사투 끝에 반쪽짜리 삼한일통을 이뤘다. 당은 제국의 위치를 과시하고 왜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와 왜, 당이 합종연횡하던 7세기의 국제 정세를 가른 싸움이지만 백촌강 전투는 상세하게 복원하기 어렵다. 전투 이름부터 ‘백촌강’과 ‘백강’ ‘백강구’가 혼용된다. 장소도 불명확하다. 금강하구설이 유력한 가운데 새만금 부근이라는 주장도 있다. 전투 상보(詳報)를 쓰기 힘든 이유는 사료의 부족과 신뢰성 결여 탓이다.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일본서기는 고대사 왜곡으로 악명 높고 삼국사기도 한계가 분명하다. ‘당 황제를 거역했기에 백제는 벌을 받아 마땅했다’고 기술한 김부식의 역사관에서 올바른 기록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공통점은 있다. 증오. 일본서기는 한반도와 단절을 강조했으며 삼국사기는 왜에 대한 증오와 백제에 대한 멸시로 가득하다. 백촌강 전투의 1차 사료에서 건질 것은 일본서기에 적시된 날짜 정도다. 병력도 미지수다. 왜군이 등장하는 수차례 기록은 지원군을 합한 것인지, 각각의 전투 참가 병력을 모두 합친 것인지 불분명하다. 확실한 점은 왜가 막대한 물량을 지원했다는 점이다. 수도까지 옮겨가며 백제 지원 여론을 형성한 왜는 화살 10만촉과 피륙 300단, 곡식 종자 3,000석을 보낼 만큼 전력을 다해 백제부흥군을 도왔다.

고구려가 661년과 662년 당의 침략을 막았다는 점, 백제계 지배층이 많았다는 점이 동인으로 보이지만 일본 주류 학계의 해석은 다르다. 신하국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백촌강 전투 패배로 한반도와의 연결고리가 얇아진 왜는 ‘일본’이라는 국호까지 확정(702년)하며 자기 정체성을 찾아 나갔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통해 일본이 탄생한 셈이다. 왜의 지원에도 백제 부흥운동은 내분으로 무너졌다. 핵심 장수인 도침을 죽인 복신이 왜에서 귀국해 왕위에 오른 부여풍에게 죽고 백제의 다른 왕자 부여융은 당나라 장수로서 부흥군에게 칼을 휘둘렀다. 배반과 분열은 정녕 우리의 천형(天刑)인가.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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