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목 시세보기

서울경제

HOME  >  오피니언  >  기획·연재

[오늘의 경제소사] 레판토 해전의 정치경제학

오스만 잔인성, 가톨릭 단결 가져와



[오늘의 경제소사] 레판토 해전의 정치경제학

1571년 10월7일, 지중해 레판토 해역. 490척의 전투함이 전력으로 노 젓는 소리가 새벽 바다의 정적을 깼다. 가톨릭 연합함대와 오스만 투르크의 함선이 뒤엉켜 다섯 시간 넘게 싸운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신성 연합함대의 완승. 함선과 병력은 오스만이 우세했다. 베네치아 110척, 스페인 75척, 교황청 23척 등 212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의 전투함에 비해 오스만은 278척. 병력도 오스만이 8만1,490명으로 6만8,500명의 가톨릭 연합보다 많았다. 단 한 가지, 대포는 연합함대가 우위였다. 1,815문 대 750문.

전술적인 측면에서 화포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승패는 개전 이전에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곧잘 관용을 베풀던 오스만은 1년간 악착같이 저항하던 키프로스를 점령하면서 약속을 깨고 주민들을 처형하고 노예로 팔아버렸다. 오스만의 잔인한 행동은 가톨릭 국가들의 단결을 가져왔다. 애초부터 오스만의 지중해 공략은 무역 국가 베네치아가 전담해온 사안. 내심 이탈리아 남부 영토의 안보를 걱정하던 스페인제국이 교황의 종용으로 팔을 걷고 나섰다.

둘째는 기술력의 차이. 오스만은 갤리선 건조대 120개를 설치하며 순식간에 대함대를 건설했으나 기술의 차이가 컸다. 근대 이전까지 세계 유일의 복합공단으로 꼽히던 베네치아 국영조선소에서 건조한 갤리선과 충돌하면 쉽게 깨졌다. 전력 구성원의 차이도 컸다. 연합함대의 주력인 베네치아 갤리선의 노잡이는 시민이었지만 오스만 함선의 노잡이는 기독교 노예들이어서 쇠사슬만 풀리면 적병으로 변했다. 전사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베네치아 귀족들의 용전도 승인으로 꼽힌다. 베네치아 귀족은 명예롭게 전사했어도 원칙적으로 국립묘지에 못 갔다. 땅과 돈이 많으니 가문에서 장례를 치르라는 취지다.

패전 소식을 접한 술탄은 ‘수염을 그을렸을 뿐’이라며 함대도 즉각 재건했으나 오스만은 깊은 내상을 입었다. 고대의 운하(오늘날 수에즈 운하)를 재건하려던 계획부터 재정난으로 밀려났다. 오스만의 해양력은 이후 해적 활동에 그쳐 지중해와 대서양 경쟁에서 밀려났다. 흥미로운 대목은 승전국들도 국운 상승의 계기로 연결하지 못했다는 점. 연합함대의 추가 공격 계획이 내분으로 무산되고 베네치아는 지중해 연안용 갤리선에만 매달리다 ‘대포로 무장한 범선’ 시대에 끼어들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으로 쉽게 이동하고 막대한 물리적 에너지를 발사해 파괴할 수 있는 대양용 범선과 대포 기술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XC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

이메일 보내기

보내는 사람

수신 메일 주소

※ 여러명에게 보낼 경우 ‘,’로 구분하세요

메일 제목

전송 취소

메일이 정상적으로 발송되었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