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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섭의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 수도꼭지 뒤엔 수십만㎞ 거대 인프라...포기 대신 위험관리부터

<15> 수돗물

수도관 광범위하게 깔려있고 노후화...파열·붉은물 사태 등 문제 잇따라

복잡한 시스템선 완벽한 유지 힘들어...받아들일 만한 위험 범위내서 관리를

수돗물 100% 안전하지 않다고 방치땐 더 큰 환경·사회적 재앙으로 이어져





어렸을 적에는 왠지 수돗물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항상 보리차를 끓여 마셨다. 어머니는 볶은 보리를 끓인 후 ‘썬키스트’ 유리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셨다. 물론 가끔 수돗물을 마시게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반 대항으로 축구 경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갈증을 참지 못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수도꼭지를 입에 물다시피 하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 했다. 그렇게 수돗물을 마시면서도 웬만하면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었다.

최근까지도 한국인의 수돗물 음용률(飮用率)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몇 차례에 걸친 수돗물 오염 사건이 이러한 인식이 만들어지는 데 한몫했다. 지난 1989년 ‘수돗물 중금속 오염 파동’과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고’ 등이 잘 알려진 사건들이다. 특히 공업시설이 밀집돼 있는 낙동강 수계를 취수원으로 삼는 동남부 지역에서 아무래도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 2018년 여름만 해도 이 지역 정수장에서 ‘과불화화합물’이 기준 농도 이상으로 검출돼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수돗물을 소독하는 데 쓰이는 염소(鹽素) 냄새가 역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에서는 “물을 받은 후 20~30분간 뒀다가 마시면” 염소 냄새가 사라진다고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수돗물 음용률이 획기적으로 올라갈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1980년대까지는 물을 끓여 마시다가 언제부턴가 ‘생수’라는 것을 마시기 시작했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집에서도 이 무렵부터 18.9ℓ짜리 생수통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푸른색을 띤 생수통을 ‘디스펜서’라는 장치에 거꾸로 꽂으면 중력의 힘으로 물이 내려오는 방식이었다. 매주 한 통씩 왔던 것 같은데, 운이 좋게도 배달하시는 분이 왔을 때 한 통을 거의 다 마셨으면 빈 생수통을 수거해갔다. 하지만 버리기에는 조금 아까울 정도로 애매하게 물이 남아 있을 경우에는 새 생수통을 옆에 두고 갔다. 이런 경우 힘을 써서 생수통을 디스펜서에 끼우는 일은 중학생이었던 내 몫이었다. 어린 나이에 물맛의 차이는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이를 계기로 집에서 보리차가 점차 사라져갔다. 가게에서도 플라스틱병에 담긴 생수를 팔기 시작했다. “봉이 김선달이냐”라며 코웃음 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수돗물을 공급하는 일은 국가가 담당하는 중요 기간 사업이다. 적절한 수질의 수돗물을 시민들에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인프라가 필요하다. 서울시의 예를 들어 보자. 서울 시민들에게 공급되는 수돗물은 한강 상류에서 시작된다. 바닷물이 증발해 공기 중으로 떠오른다. 대기 중의 수증기는 기상 조건에 따라 응결해 비와 눈의 형태로 다시 떨어진다. 이렇게 다시 땅으로 돌아온 물은 산간 지대에서 작은 개울을 이뤄 낮은 지대로 내려온다. 물은 내려오면서 지류와 지류가 합쳐져 점점 큰물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자연의 힘으로 형성된 한강 상류에 네 곳의 취수장(取水場)이 설치돼 있다. 취수장으로 들어온 한강 물은 정수센터에서 오존 유기물 질산화 등 처리 과정을 거치면서 불순물이 제거된 후 각종 약품 처리가 이뤄진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서울시 성동구에 위치한 수도박물관을 방문해볼 것을 권한다.)

한강 상류의 정수센터에서 ‘만들어진’ 물은 상수도 관로를 타고 서울 시내 각 가정으로 공급된다. 상수도관은 땅속에 묻혀 있다. 가끔 길거리를 지나다가 “상수도 공사 중”이라는 표지판을 본 적 있을 것이다. 수돗물이 지나가는 관로에 문제가 생기면 아스팔트를 뜯고 땅을 파서 상수도관을 들어낸 후 파이프 연결부위를 분해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상수도 설비와 같은 인프라는 한 번 설치되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된다. 눈에 띄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멀쩡하게 수돗물이 잘 나오는데 얘기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와중에도 서울시 상수도 총연장은 1982년에 약 4,200㎞에서 2007년에 1만4,027㎞로 세 배 이상 증가했다. 도시가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그만큼 수돗물에 대한 수요 역시 늘어났던 것이다.



‘붉은 수돗물’ 피해가 발생한 뒤 인천 서구 청라동 급배수 계통 소화전에서 이토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사진제공=인천시


인프라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사라진다. 역으로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 순간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번개가 치는 찰나 동안 물체의 윤곽을 볼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2019년 5월30일부터 수개월에 걸쳐 인천시 일부 지역과 강화군 일대에 통상 ‘녹물’이라고 부르는 붉은 수돗물이 나오는 사고가 있었다. 수돗물에 녹물이 섞여 나오는 현상이 드문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강 상류에서 수도꼭지까지 긴 거리를 수돗물이 이동해 오면서 어디에서라도 문제가 생기면 녹물이 발생한다. 대개는 주택 내 수도관이 노후해 발생한다. 이 경우는 한참 동안 수돗물을 틀어 놓으면 없어지게 된다. ‘인천 붉은 수돗물 사태’는 이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문제가 지속됐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태를 통해 우리는 평소에 알지 못했던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사태의 원인을 조사한 인천상수도사업본부와 환경부의 설명에 따르면 취수장에서 수계 전환을 한 것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한강 상류의 풍납취수장에 전기공사를 하게 됐다. 공사 시간 동안 인천 지역의 단수를 피하기 위해서는 다른 취수장의 물을 끌어다 써야 했다. 인천상수도사업본부는 풍납취수장보다 더 상류에 위치한 팔당취수장의 물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상수도 관로를 흐르는 물의 방향이 바뀌면서 유속(流速)이 두 배가량 증가했다. 이 때문에 바닥에 깔려 있던 침전물이 떠올랐고 상수도관이 꺾이는 부위에 흔히 발생하는 녹이 떨어져 나오면서 붉은 수돗물이 나오게 됐다. 일단 상수도관에 부유물이 떠다니기 시작하면 그것들이 벽면에 부딪히면서 더 많은 부유물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다. 복잡한 기술 시스템에서 “연속적인 실패(cascading failure)”가 일어난다는 위험이론에 부합하는 사건이었다.

인천의 사례는 우리가 사용하는 수도꼭지 배후에 거대한 인프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나아가 그 인프라는 항상 완벽한 상태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 역시 알려준다. 집에서 사용하는 정수기 정도의 규모라면 기계를 분해해 물이 통과하는 관을 세척하거나 통째로 교체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시에만 1만4,000㎞가 넘는 길이의 상수도 관로를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문제가 생기면 땜질하는 식으로 처방하고, 정해진 일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인프라를 교체하는 것이 최선이다. 실제로 서울시에선 최근 내구연한이 경과된 배관의 상당수를 녹이 슬지 않는 신형 수도관으로 교체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사정은 인프라를 “받아들일 만한 위험(acceptable risk)”의 범위 내에서 관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100% 안전하지 않다고 해서 수돗물을 포기해 버린다면 더 큰 환경적·사회적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서울과기대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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