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월10일 부산 국제여객터미널. 전국주부교실 부산지부 회원 17명이 부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방일 목적은 시모노세키 부인회와의 자매결연. 현지에서 환영받기는 했어도 자매결연 행사는 없었다. 일정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쇼핑. 시모노세키와 후쿠오카 상가를 훑었다. 3일 뒤 9명, 5일 뒤 4명이 각각 페리 편으로 귀국하고 나머지 4명은 비행기 편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것 같았던 주부들의 일본 여행은 한 달 뒤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으로 커졌다. 발단은 일본 아사히신문의 보도.
‘한국 손님 덕분에 매상이 늘어난다’는 제목의 기사는 이런 내용을 담았다. ‘한국의 여성단체 회원들이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쇼핑에 나서 주방기구와 전자제품·손목시계·화장품 등을 무더기로 샀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쇼핑만 해서 귀국길 통관 검색대에서는 손이 모자라 발로 짐을 밀어 운반하는 부인도 있었다.’ 마침 해외여행 자유화의 부작용을 염려하던 시기에 한국 언론도 이를 크게 다뤘다. ‘분별없는 아줌마들의 걸신스러운 쇼핑 바람으로 나라가 망신을 샀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부산은 더 시끄러웠다. 검찰은 여행사 직원 2명을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해당 부인들은 ‘남들처럼 샀을 뿐’이라고 둘러댔으나 반입품 중 40%의 물품을 자진반납 형식으로 세관에 넘겼다. 주부들이 너나없이 들고온 일본제 전기밥솥의 상표 이름을 따서 ‘코끼리 밥솥 사건’이라고 불린 사건은 이로써 끝났다. 그러나 파장은 오래갔다. ‘무분별한 해외여행’에 대한 경각심이 일고 정부는 생활용품 국산화·고급화를 위한 지원을 늘렸다. 결정적으로 외환위기(IMF)를 맞아 원화 가치가 떨어져 수입품 가격이 비싸진 순간에 품질 좋은 토종 브랜드가 등장하면서 ‘일제 밥솥 선호’는 옛날 얘기가 됐다.
국산 전기밥솥의 성공이 인터넷과 일부 책자에서는 왜곡되어 전해진다. 관련 보고를 들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6개월 만에 일제와 견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내라’고 지시해 국산 신화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권력형 비리를 덮으려 사건을 키웠다는 시각도 있다. 잘못된 과거 인식 탓일까. 현재는 더 나빠 보인다. 37년 전 외제품 밀반입이 드러난 당사자는 고개를 숙였고 사회구성원들은 분노했다. 반칙과 교육 특혜, 부동산 투기가 드러나도 요즘은 고개를 빳빳이 든다. 국민 역시 그들을 심판하지 않는다. 부끄러움과 공분이 사라진 사회는 반칙과 특혜의 망령이 지배하기 마련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