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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 '눈먼 자들의 도시'는 될 수 없다

정민정 논설위원

中정부 안일한 대응·통제에만 급급

신종 코로나 사태 악화 비난 쏟아져

위기 대처 때 국가 진짜 실력 드러나

두 눈 똑바로 뜨고 감시·행동해야





어느 날 아침 차 한 대가 갑자기 멈춰 선다. 뒤따르던 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이내 아수라장이 된다. 가까스로 차에서 내린 사람이 “눈이 안 보인다”고 외친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잇따라 눈이 멀고, 마침내 도시 전체에 눈이 보이지 않는 전염병이 퍼진다.

지난 1998년 노벨상을 받은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한 도시에 실명이라는 전염병이 퍼진다는 섬뜩한 설정에서 출발한다. 국가 공권력은 눈먼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고 집단수용소로 몰아넣는데 이 안에선 무질서·부패·폭력·착취가 판치면서 인간의 밑바닥이 드러난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정상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주변 사람들을 돌본다.

20여년 전 소설을 새삼 소환한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조짐이 심상치 않아서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490명을 넘어선 가운데 중국 정부의 안일한 대응과 은폐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12월8일 우한 화난수산시장에서 최초의 신종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지만 경보가 내려진 것은 22일이나 지난 30일이었다. 또한 의사가 폐렴 의심환자를 진료하다가 신종 코로나 양성 반응을 확인해 위챗으로 알렸지만 공안 당국은 그를 비롯한 의료인 8명을 괴담 유포 혐의로 체포했다(결국 해당 의사는 신종 코로나에 감염됐다). 후베이성 밖까지 확산돼 시진핑 주석이 ‘전염병과의 전쟁’을 선포한 후에야 중국 정부는 대응에 나섰다. 첫 사망자가 나올 때까지 정보 통제에만 급급했던 중국에는 ‘글로벌 민폐’라는 비난까지 쏟아졌다.

현재 중국의 대처는 후베이성·저장성 등 일부 지역의 폐쇄와 외출금지령 등 물리적인 조치에 방점을 찍은 모양새다. 추가 확산을 막기 위해 물리적 이동과 사람 간 접촉을 금지하는 강력한 조치가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적절한 의료적 처치와 긴급 구호물자 지원 등을 통해 무고한 인명 피해를 막는 일이 병행돼야 한다. 하지만 의료 지원은커녕 생필품조차 구하기 어렵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눈먼 자들의 도시’와 같은 재앙이 현실화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1월26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지며 수백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한 유튜브 영상은 그런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마스크를 쓰고 카메라 앞에 선 우한 청년은 “우한시 당국과 공산당이 (신종 코로나에 대한 정보를) 제때 알리지 않아 거리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거나 마작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며 “2003년 사스를 경험하고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병이 의심되면 치료를 해줘야 하는데 의료진이 부족하니 돌아가 자가 격리하라는 말을 듣고 돌아서야 한다”며 “세상에 어떤 국가가 이런 식으로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가장 먼저 눈이 멀었던 사람이 눈을 뜬 후 사람들이 차례로 시력을 회복하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들이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세상은 인간성이 말살되고 국가는 존재 의미를 상실한 폐허더미로 변해버린 뒤였다. 소설은 모든 것을 목격한 의사 아내의 고백으로 끝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은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현재까지 신종 코로나 사망자의 99.9%는 중국에서 발생했다. 국내에서는 19명의 확진자가 나왔고 이중 일부는 정부 방역망을 벗어난 상태에서 감염됐다. 신종 코로나가 몰고 온 세계적인 비상사태는 위기에 대처하는 국가의 진짜 실력을 드러낸다.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은 눈먼 자들’이 많으면 실력 있는 국가를 가질 수 없는 법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감시하며 행동해야 내 나라의 실력을 키울 수 있다.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이 남긴 이 말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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