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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뒤집힌 지도’와 ‘더러운 평화’

정민정 국제부장

한반도 위아래 뒤집힌 동아시아 지도

美,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강조

우크라전 실전 쌓은 북한군 위협 속

주한미군 감축 막고 안보 지켜야

주한미군이 위아래가 뒤집힌 동아시아 지도를 제작해 교육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한미동맹재단이 제공한 사진. /연합뉴스




최근 한 장의 지도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반도를 가운데 놓고 남북을 180도 뒤집은 ‘동아시아 지도’다. 주한미군사령부가 자리한 경기 평택 캠프험프리스를 기점으로 타이베이(1425㎞)와 마닐라(2550㎞), 베이징(985㎞), 평양(255㎞)까지의 직선 거리가 표시됐다. 위아래만 뒤집은 게 아니라 대만·필리핀 등이 한 지도에 드러나도록 각도를 틀었다. 지난해 부임한 제이비어 브런슨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의 지시로 제작됐고 주한미군이 자체 교육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거나 남중국해에서 충돌이 벌어질 경우 주한미군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브런슨 사령관은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의 항공모함과 같다”는 발언을 통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강조해 왔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선 뒤 주한미군 감축·이전 배치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온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미국이 항상 모든 곳에 있을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했다. 헤그세스의 수석고문을 지낸 댄 콜드웰은 현재 약 2만 8500명 수준인 주한미군 중에서 전투병력 대부분을 철수하고 약 1만 명만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새 국방전략(NDS)이 8월 공개 예정인 가운데 주한미군 감축설이 흘러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닐 터다. 현재 워싱턴에서는 한국 내 미군기지를 활용해 작전을 펼칠 수 있는 방안을 놓고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군이 북한 핵·미사일 위협을 억제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주한미군은 중국 견제에 맞춰 역할을 조정하는 쪽으로 무게가 실리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 감축이 기본값으로 논의되고 있다. 특히 NDS 수립을 주도하고 있는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차관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는 점에서 주한미군 감축은 기우(杞憂)에 그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최근에는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가 한반도 내 미군 태세 변화에 앞서 국방장관의 의회 보증을 명시하도록 국방수권법안(NDAA) 문안을 변경했다. 일각에서는 실질적 제어장치 없이 국방장관 보증만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되면서 주한미군 감축 여지를 열어 놓은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주한미군 방위비 100억 달러(약 13조 7000억 원) 청구서를 ‘협상용 겁박’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한가한 발상이다. 트럼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과 합의한 국방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지출도 우리 측에 요구했다. 한국이 감당하기 어려운 청구서들을 내민 뒤 자신의 입맛에 맞게 인도태평양 국방전략을 개편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이런데도 국내에서는 주한미군 감축을 불가피한 수순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 전 미국이 한반도를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이 북한의 오판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손 놓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성남시장 시절부터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다 낫다”는 말을 종종 했다. 확실한 안보는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 즉 평화를 만드는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북한에 할 말을 하지 않고 굴욕적으로 양보할 수 있다는 발언으로 읽히며 보수층의 반발을 불렀다. 하지만 ‘더러운 평화’의 대상을 트럼프 행정부로 옮겨 놓고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친구가 적보다 나빴다”며 동맹부터 청구서를 내미는 트럼프를 상대하려면 ‘더러운 안보’조차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주한미군 대규모 감축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뒤흔들 수 있는 만큼 ‘더럽고 치사해도’ 막아야 하는 까닭이다. 북한군은 우크라이나전 파병을 계기로 실전 경험을 쌓았고 러시아로부터 첨단 군사 기술을 이전 받으며 실존하는 위협이 됐다.

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안보 앞에서 ‘깨끗한 평화’ ‘더러운 평화’라는 구분은 의미 없다. ‘뒤집힌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트럼프 호(號)’가 향하지 않도록 ‘더러운 평화’라도 움켜쥐어야 한다. 1980년대 운동권은 ‘양키 고 홈(Yankee go home)’을 외쳤다. 지금은 자국 군인의 해외 파병을 극도로 싫어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반길 구호다.

정민정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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