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겊 또는 부직포 조각에 불과한 마스크지만 우리는 그 보호막 안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타인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감추는 모종의 가림막이기도 하다. 세계 미술계의 스타작가 에르빈 부름(65·Erwin Wurm)의 ‘비니’도 상반된 감정의 교차를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머리에 딱 붙는 털모자인 비니를, 그는 폭 133㎝, 높이 144㎝의 초대형 조각으로 제작했다. 모자를 쓰듯 그 아래에 서면 어른도 몸의 절반 이상이 가려진다. 온몸을 감싼 안온감을 느끼나 싶다가도, 순식간에 키가 작아진 앨리스처럼 기묘한 공포감이 스친다. 친숙한 물건의 비정상적인 크기 앞에서, 평온한 일상의 감사함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요즘 유럽에서 가장 ‘핫’한 작가이자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오스트리아 국가관 대표작가로 참여하는 등 국제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부름의 개인전이 종로구 율곡로 리만머핀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안녕 서울!’이라는 전시 제목과 함께 한국을 찾아오려던 작가는 갑작스런 코로나19 확산으로 방한 일정을 한 달 이상 연기했다.
지난해 ‘아트바젤 홍콩’에서는 연분홍에 초록색 테를 두른 그의 ‘비니’가 1억원 이상을 호가하며 주목을 끌었다. 이번 전시에는 핑크색 엑스(X)자가 그려진 회색 비니를 내놓았는데, 묵직한 레진 조각이지만 작품 표면은 실제 울소재 니트로 제작됐다.
부름의 대표작은 1990년대 초부터 화제가 된 ‘1분 조각’이다. 관객이 작가가 그려준 드로잉과 적어준 지시문에 따라 1분 동안 조각이 되는 ‘참여형 퍼포먼스’ 작품이다. 양동이 안에 들어가 다른 양동이를 머리에 뒤집어 쓴 채 서 있거나, 뚫린 구멍 안에 머리를 넣고 있는 식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분 조각’의 연장선 상에 있는 ‘영원한 1분’을 만날 수 있다.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1분 조각’과 달리 ‘영원한 1분’은 콘크리트로 빚은 조각이다. 예술의 영원성을 희롱하는 듯 손가락 끝에 오렌지와 레몬이 하나씩 매달린 작품에는 ‘손/과일’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지난 22일 뉴욕 리만머핀갤러리에서 막 내린 개인전에서는 손가락 끝에 오렌지 3개가 매달린 작품 등이 선보였다.
부름의 인기작인 일명 ‘뚱뚱한 집’도 눈길을 끈다. “사물의 형태 변화가 그 정체성과 내용 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심이 많다. 예컨대 집이나 차, 사람이 뚱뚱해질 때가 있고 정반대로 집이 지나치게 날씬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 작가는 역사적 인물이 살았던 집을 그들의 초상으로 해석했다. 부피와 크기를 제멋대로 바꿔놓는 그의 작품을 두고 유쾌한 풍자라는 평가가 따른다. 조금만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모순의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이 감지된다. 4월 11일까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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