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술을 대표하는 사조는 당연히 인상주의다.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초기에는 온갖 악담과 조롱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인상주의의 인정을 막았던 예술, 당시 지배층과 대중이 좋아했던 예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미술사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혁신적이어서 결국 승리한’ 인상주의와 ‘진부하고 고루하며 당시에는 각광을 받았지만 결국 패배한’ 반대편을 대립하는 쌍으로 다뤄왔다.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는데 지난 수십년 동안 서구 바깥에서는 그런 제도권 미술 자체를 보기가 어려웠다. 미술사 책에 잘 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파리를 가보면 인상주의를 비롯한 ‘혁신적인’ 유파의 작품보다 ‘진부한’ 작품이 훨씬 더 많이 전시돼 있는 것에 놀라게 된다.
예술가와 작품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잊혔거나 낮은 평가를 받다가 한참 뒤에 조명을 받은 예술가들이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나 엘 그레코, 카라바조, 얀 페르메이르 같은 이들이다. 이와 반대로 생전에 영예를 누리다가 사후에 평판이 떨어진 이들도 있다. 인상주의의 반대편에 있었던 화가들이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신진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으려면 관립전람회, 바로 ‘살롱(Salon de Paris)’을 거쳐야 했다. 살롱의 일등상이 ‘로마상(Prix de Rome)’이었다. 로마 유학 후 궁정의 주문을 받는 엘리트 코스였다. 로마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살롱에서 입선해야 주목받았다. 살롱에서는 그림 주제에 서열이 있었다. 역사와 신화를 다룬 미술품이 시민의 도덕관념을 고양시킨다는 이유로 가장 높은 위계를 차지했다. 초상화나 정물화처럼 일상적인 제재를 담은 미술품은 위계가 낮았고 파격적인 미술품은 배척받았다. 심사위원들은 전통적인 스타일에 집착했다. 살롱을 둘러싼 미술계의 구도는 당연하게도 이 체제에 잘 맞는 예술가와 잘 맞지 않는 예술가들을 낳았다. 살롱에서 성공했던 화가들을 ‘관학파’ 혹은 ‘아카데미즘 예술가’라고도 한다. 국가기관이 공인한 교육의 체계와 취향을 따르는 예술가라는 것이다. 부그로·제롬·카바넬·메소니에가 그들이다.
19세기 부그로·메소니에·제롬 등
국가공인 교육·취향 따르며 명성
혁신 추구했던 화가들은 조롱 대상서
수십년 뒤 미술계 대표로 우뚝 ‘반전’
1980년대엔 난해한 현대미술 대신
고전적 反인상주의 다시 주목받아
아돌프 부그로(1825~1905)는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고 1850년에 로마상을 받은 후 이듬해 로마로 유학해서는 이탈리아의 옛 미술품을 연구했다. 프랑스로 돌아와 제도권에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1859년 겨우 서른넷의 나이로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다. 명성이 명성을 낳으면서 주문이 쇄도했다. 1866년부터 뒤랑 뤼엘이 부그로의 작품을 취급했고 미국인 수집가들이 작품 가격을 올려놓았다. 부그로는 1876년에 아카데미 회원이 됐고 1888년부터 파리 국립 미술학교와 쥘리앵아카데미 양쪽의 교수로 재직했다.
부그로의 그림은 세련된 기법을 구사해 윤곽이 뚜렷하고 분위기는 차분하다. 서정적이면서도 관능적이고 고답적이다. 인상주의를 비롯한 새로운 조류의 예술가들은 부그로를 싫어했다. 폴 고갱(1848~1903)은 프랑스 아를의 어느 창관에 걸린 부그로의 그림을 보고는, 창관에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고 평했다. 애초에 그 창관을 드나들지 않았더라면 부그로의 그림을 발견할 수도 없었겠지만.
에르네스트 메소니에(1815~1891)도 19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큰 명성을 누렸다. 그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를 모범으로 삼아 일상을 치밀하게 묘사하려 했다. 한동안 17세기와 18세기 사람들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묘사한 작품을 내놓았는데 1850년대 이후로 나폴레옹이 전장에서 거둔 승리와 시련을 다루면서 연달아 성공을 거뒀다. 파리 근교의 푸아시에 거대한 스튜디오를 마련해 전투 장면을 박진감 넘치도록 묘사하는 데 주력했던 메소니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메소니에가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인상주의 화가들은 가난에 허덕였고 후에 인상주의 화가들이 미술계를 대표하게 되면서 메소니에의 명성은 그의 사후 10여년 만에 수그러들었다.
메소니에는 퇴장당한 고루한 예술가를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메소니에가 당시에 혁신적인 예술가였던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크루아를 지지했다는 점, 인상주의 화가였던 에드가르 드가가 메소니에를 높이 샀던 점 같은 건 무시됐다. 메소니에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묘사한 대리석상이 루브르미술관에 설치됐는데 1964년 앙드레 말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이 상을 쫓아 내버렸다. 이 상은 메소니에의 저택과 작업실이 있었던 푸아시로 옮겨졌다.
하지만 1980년대 이래 부그로와 메소니에에 대한 평판은 달라졌다. 난해한 현대미술에 대한 반발로 고전적인 구상미술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나면서 ‘관학파’의 작품은 점점 더 관심을 받고 있다. 20~30년 전에는 이들의 작품을 아예 보기도 어려웠던 것에 비춰보면 어쩌면 이런 흐름이 이어져 이들은 ‘복권’될지도 모른다.
미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포수였던 요기 베라의 명언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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