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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음악으로 듣는 여행]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의 '때늦은 음악열정' 귓가에 들리는듯

■프랑스 샹베리 '루소의 집'

알프스산 보이는 시골마을 소박한 집

'후원자' 바랑 부인과 지내며 꿈 이어가

작은 방엔 건반악기·악보만 덩그러니

직접 대본 쓰고 작곡한 '마을의 점쟁이'

모차르트가 12세에 오페라로 만들어

'바스티안과 바스티엔'으로 재탄생

프랑스 샹베리에 위치한 이 집에서 계몽주의자 루소는 위대한 사상가가 되기 위한 지적 토대를 다지는 한편, ‘마을의 점쟁이’라는 오페라를 직접 쓰는 등 음악 열정을 펼쳤다. /사진제공=진회숙




프랑스 샹베리에 위치한 루소의 집 안내판. /사진제공=진회숙


루소는 <사회계약론> <에밀>을 쓴 계몽주의 사상가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가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유명해지기 전은 물론이고 유명해진 후에도 루소는 늘 천부적인 재능과 체계적인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 장르를 기웃거렸다. 음악에 대한 열망은 하늘을 치솟을 듯 높았으나 불행히도 환경이 이를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살 때 기술을 익히기 위해 조각공인 아벨 뒤코맹의 견습생으로 들어갔지만 작업장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16살 때 도망쳐 나왔다. 그 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17살에 바랑 부인을 만나면서 인생 역전의 기회를 얻었다. 바랑 부인은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젊은 미망인으로 루소를 만날 당시 그녀의 나이는 28살이었다. 바랑 부인은 소년 루소의 지적 잠재력을 단번에 알아 보고 이후 10여 년 간 그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루소와 바랑 부인은 프랑스 남부에 있는 아름다운 호반 도시 앙시에서 처음 만났다. 앙시는 유럽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관광도시다. 아름다운 호수 저 너머로 알프스 산맥이 펼쳐지고, 중세 구옥들이 늘어선 거리 굽이굽이로 작은 운하가 흐르는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거리 안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는 루소와 바랑 부인이 만났던 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헐리고 없다. 대신 두 사람이 만난 장소를 표시해주는 기념비가 서 있다. 기념비에는 “여기서 루소가 바랑 부인을 만났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후 바랑 부인은 샹베리의 레 사르메테스 계곡 근처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루소는 이 집에서 바랑 부인의 후원 아래 책을 읽고, 연구하고, 사색하고, 토론하고, 음악을 듣고, 사람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훗날 루소를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었던 지적 토대가 바로 이 곳에서 다져졌다. 루소와 바랑 부인이 살던 샹베리의 집은 현재 ‘루소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돼 있다.

샹베리는 파리에서 차로 9시간 걸리는 한적하고 외진 도시이다. 시내에서 구불구불 언덕을 올라가면 저 멀리 알프스 산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루소의 집이 있었다. 집 주변에는 루소가 직접 설계했다는 과수원과 약용식물을 기르는 밭이 있는데, 맞은 편으로 바라다보는 풍광이 시원하고 장엄하다. 루소는 이런 험준한 풍광을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의 <고백록>에 샹베리의 집을 찾아오는 여정을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거기서 그는 평야보다는 험준한 산을, 급류와 폭포, 험한 길, 절벽 등을 좋아한다고 했다. “길이 폭포 밑을 지나는데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였다. 산이 몹시 가팔라 물이 바위에서 뚝 떨어져 활 모양을 이루며 멀리 떨어져서 몸에 물을 적시지 않고도 폭포와 바위 사이를 지날 수 있었다.” 이렇게 험준한 풍광을 뚫고 루소는 샹베리의 집에 도착했다.

장엄한 풍광에 비해 집은 작고 소박했다. 2층에 있는 바랑 부인의 방은 꽃무늬 벽지가 발라져 있으며, 소박한 화장대, 나지막한 책상, 장식장, 분홍 꽃무늬 천의 캐노피가 있는 침대가 전부인 정갈한 방이었다. 그 옆에 루소의 방이 있다. 화사한 바랑 부인의 방에 비해 루소의 방은 다소 어두워 보였다. 방에서는 그가 직접 설계한 남쪽의 과수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침대 위에는 다락이 있고 그 옆에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침대는 매우 답답해 보였다. 하지만 루소는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을 바랑 부인의 방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루소가 가장 열정을 쏟았던 분야는 음악이다. 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 취미가 점점 커져서 이윽고 나의 모든 취미들을 흡수해 버렸다. 그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정녕 나는 이 예술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릴 때부터 이 예술을 좋아해서 변함없이 이 예술만을 사랑했다. 놀라운 것은 내가 이것을 위해 태어났건만 이것을 배우는 데에 그토록 힘이 들었고, 또 성과를 거두는 것도 더뎠다는 것이다. 평생을 두고 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악보를 보고 그 자리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부르는 경지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다.’

음악가가 되려면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어려서부터 음악적 감수성을 키우기 위한 체계적 훈련을 받아야 한다. 특히 음에 대한 직관적 감수성은 마치 언어와 같아서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를 음악과 무관한 환경에서 보낸 루소는 청년이 되어 음악에 때늦은 열정을 불태우며 그 시간을 만회하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으나 한계가 있었다.



바랑 부인은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우도록 그를 파리 출신의 작곡가이자 성가대 학교의 악장인 르 메트르에게 보냈다. 루소는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음악에 푹 빠져 살던 이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한다. 특히 그는 르 메트르가 자기를 위해 지어준 짤막한 독주곡을 연주하기 위해 리코더를 들고 단상에 있는 오케스트라로 자리를 잡으러 갈 때의 자부심을 잊지 못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정말 음악가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샹베리에 위치한 루소의 집에는 그의 음악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건반 악기를 만날 수 있다. /사진제공=진회숙


루소의 집에도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늠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작은 건반 악기가 놓여 있는 방이다. 이곳에서 루소와 바랑 부인은 수시로 하우스 콘서트를 열었다. 바랑 부인은 노래를 잘 불렀으며 하프시코드도 연주할 줄 알았다. 루소는 그녀로부터 노래를 배웠다. 루소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그는 계명창은커녕 음표나 박자, 악상기호 같은 것도 잘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으로 음악에 끌렸다.

루소는 바랑 부인과 함께 음악공부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당시 그는 바랑 부인을 ‘엄마’라고 불렀는데, 자기와 엄마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바로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루소가 실력이 달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음악실력이 비슷해졌다. 작은 건반 악기가 있는 샹베리 집의 이 방은 두 사람은 즐거운 놀이터였다.

건반 악기 위에는 작은 악보가 놓여 있다. 루소가 창안한 숫자 악보다. 숫자 하나로 음표와 쉼표, 옥타브, 소절, 박자, 장단을 한 번에 표현하는 새로운 악보로, 루소는 이 획기적인 기보법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새로운 기보법을 발표했다.

그런데 심사를 맡은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은 루소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어설픈 논리로 이것을 새로운 발명품으로 인정하기를 거절했다. 기보법에 대해 단 한 사람만 설득력 있는 비판을 했는데, 그가 바로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 라모였다. 라모는 루소의 숫자 악보가 매우 훌륭한 고안품이지만 실제 연주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얘기했다. 전통적인 악보는 음의 높이와 길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연주자들이 즉각적으로 이를 연주에 옮길 수 있지만, 루소의 숫자 악보는 머리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연주 실행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루소의 집 건반악기에 놓인 악보는 그의 ‘좌절된 꿈’이다. 그렇다고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그 후로 그는 숫자 악보보다 더 야무진 꿈, 즉 음악을 직접 작곡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그 꿈을 실행에 옮겼다. <마을의 점쟁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한 것이다. 루소는 <마을의 점쟁이>의 대본을 직접 썼다. 오페라의 등장인물은 양치기 청년 콜랑과 양치기 처녀 콜레트, 마을의 점쟁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인데, 단출한 등장인물만큼이나 줄거리도 단순하다. 서로에 대한 오해로 사이가 살짝 틀어진 콜랑과 콜레트가 마을 점쟁이의 도움을 받아 예전의 사랑을 다시 찾는다는 것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이야기가 당시에는 꽤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면서 <마을의 점쟁이>가 초연된 지 불과 6개월만에 ‘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의 사랑’이라는 패러디가 만들어졌다. 이 패러디물의 인기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의 다른 나라까지 퍼져나갔다. 독일어로 번역돼 오스트리아 빈의 부르크테아터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그 후 잘츠부르크의 트럼펫 주자 샤하트너가 이야기를 보완해 오페라 대본을 만들었고, 1768년, 12살의 모차르트가 이 대본에 곡을 붙였다. 이것이 바로 모차르트의 첫 번째 징슈필(독일어 오페라) <바스티안과 바스티엔>이다.

음악방의 작은 건반 악기 위에는 음악가로서의 루소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작품을 소개하는 팻말이 놓여 있다. 라모의 오페라 <우아한 인도>, 페르골레지의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 루소의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바스티안과 바스티엔>다. 그렇게 나는 샹베리의 집에서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가 아닌 음악가 루소를 만났다.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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