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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외칼럼
[진회숙의 음악으로 듣는 여행] 파이프 오르간의 웅장한 선율…마치 중세에 온듯

■영국 일리 대성당

아담한 마을에 자리잡은 거대한 성당

애초 로마네스크 건축으로 지어졌지만

재건 거치며 곳곳에 고딕양식 덧입혀

천지창조 등 성서장면 새긴 중앙 천장

예수의 고난 담은 황금빛 제단 장식엔

중세유럽의 삶·종교문화가 고스란히

영국의 일리 대성당 외관. /사진제공=진회숙




줄거리는 하나도 생각 안 나는데 어떤 한 장면만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 나에게는 ‘주피터 어센딩’이 바로 그런 영화다. 줄거리는 다 잊어버렸지만 단 하나의 장면만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주인공 주피터가 타이터스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주피터 역을 맡은 밀라 쿠니스는 붉은 꽃으로 장식한 화려한 화관과 드레스를 입고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의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서 아래로 하강한다. 참으로 신비하고 환상적인 결혼식인데, 이 장면을 찍은 곳은 바로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에 있는 엘리 대성당이다.

일리 대성당은 케임브리지와 가까운 곳에 있다. 케임브리지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 사실 일리 대성당을 찾기 전까지 일리(Ely)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청교도 혁명으로 유명한 올리버 크롬웰의 생가가 이 곳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런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와 달리 일리는 상대적으로 한적한 곳이다. 지금도 그러니 아마 과거에는 더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당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렇게 유럽의 성당들은 마을의 규모를 압도한다. 작고 아담한 마을 한가운데에 엄청나게 큰 성당이 그로테스크하게 서 있다. 중세에는 빛과 어둠이 이런 방식으로 공존했다. 현재의 우리는 그 엄청난 광휘 뒤에 드리운 깊은 음영을 잘 보지 못하지만 말이다.

영국의 일리 대성당 내부. /사진제공=진회숙


일리 대성당의 기원은 10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초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그 후 이곳저곳 재건하고 보수하는 과정에서 예배실 현관과 레이디 채플, 성가대석은 화려한 고딕 스타일로 바뀌었다.

나는 여행 중에 성당을 방문할 때면 될 수 있는 대로 예배에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성당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체험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당 홈페이지에 들어가 미리 예배 시간을 알아보았다. 일요일 아침 10시 30분에 성찬예배가 있다고 나와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정면으로 기다란 네이브(성당의 중앙회랑에 해당하는 중심부)가 나타났다. 이 성당의 네이브 길이는 75m로 영국에서 가장 길다고 한다. 네이브 위의 천장은 아름다운 그림 패널로 장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갈색 톤을 지닌 그림에는 예수의 계보를 나뭇가지 형태로 표현한 ‘이새의 나무’와 천지창조에서부터 계시에 이르는 성서의 여러 장면이 그려져 있다.

네이브의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보았다. 일요일 아침 예배라서 그런지 의식이 상당히 복잡하고 예배 시간도 길었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보이 소프라노와 성인 남성으로 구성된 성가대가 부르는 성가였다. 일리 대성당은 전속 성가대를 둔 몇 안 되는 성당 중 하나다. 성가대의 기원은 멀리 16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현재 성가대원은 7세에서 13세에 이르는 변성기 이전의 소년 22명과 6명의 성인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주 일요일과 축일, 그리고 저녁 예배에 가면 이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각종 콘서트와 리사이틀을 열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정보는 성당 홈페이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유럽의 성당들은 오르간 연주나 합창 공연, 개인 리사이틀이나 콘서트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여는 경우가 많다. 미리 정보를 알고 이에 맞춰 여행계획을 세우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예배 참석자 대부분은 관광객이었다. 중세에는 신도들이 이 어마어마한 공간을 가득 채웠을 것을 생각하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자원봉사자들이 예배 참석자를 위해 예배순서와 노래 악보와 가사, 기도문이 실린 소책자를 나누어 주었다, 살면서 개신교 예배에만 참석했던 나로서는 의식이 상당히 낯설었다. 헨리 8세가 영국국교회를 세운 후 일리 대성당 역시 그 밑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의식 자체는 옛 가톨릭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음악이 낯설었다. 개신교 찬송가는 거의 다 알고 있지만, 예배에서 연주된 음악이나 회중이 같이 부르는 노래 중에 아는 노래는 단 하나도 없었다.

역설적으로 나는 음악들이 낯설어서 좋았다. 중세로 돌아간 느낌, 음악을 통해서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음악의 전통에 따라 남자로만 구성된 성가대가 라틴어 가사의 다성 합창곡을 불렀는데, 그 노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작곡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선율을 저토록 정교한 솜씨로 다듬을 수 있을까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성당의 드높은 공간을 타고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역시 성가는 여러 개의 독립된 성부가 샘솟듯 솟아나는 다성음악(polyphony)으로 불러야 제맛이 난다. 소프라노만 주인공이고 다른 성부는 모두 시녀인 호모포니(homophony)는 어느덧 솟아났다가 사라지고 그랬다가 다시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는 중세적 ‘끼어듦’의 신비를 표현할 수 없다.

영국의 엘리 대성당의 내부 모습. /사진제공=진회숙


노래와 함께 내 마음을 사로잡은 ‘소리’는 신비로운 파이프 오르간이었다. 제단 앞쪽에 성가대석이 있고 그 위로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데, 일리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지만 장식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르간의 상하부뿐만 아니라 파이프 자체에도 장식이 있었는데, 여덟 명의 천사가 트럼펫을 불고 있는 상층부의 장식이 특히 환상적이었다.

여행 초반에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델의 오르간 음악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일리 대성당에서도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듣는 행운을 맛보았다. 또 다시 체험하는 환상적인 소리의 향연. 고딕 양식의 성당에서 오르간 소리를 들으면 그 웅장한 소리 자체에 압도되고 만다. 내가 신 앞에 한없이 초라한 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에 사는 사람도 이 정도니 옛날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서양의 교회는 수세기에 걸쳐서 민중들의 마음을 압도할 여러 장치를 매우 정교하게, 매우 예술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 정점에 바로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그 웅장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 인간은 신 앞에서 달리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배가 끝난 후 천천히 성당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네이브 끝에 있는 십자형 교차로의 한 가운데에 8각형 모양의 천장이 있었다. 일명 팔각 타워(octagon tower)라고 불리는 이 공간은 중세 건축기술의 걸작으로 꼽히는 곳이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나선형의 좁은 돌계단을 밟고 탑 꼭대기로 올라가면 성당 안에서는 안 보이는 탑의 구조물을 자세히 볼 수 있다. 탑의 내부는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의 모습이 그려진 패널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림 패널 하나를 창문처럼 열면 탑의 내부와 함께 40m 높이의 성당 안이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팔각 타워와 더불어 일리 대성당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조지 길버트 스코트가 제작한 제단 장식벽이다. 이것은 일종의 ‘금빛 환상’이다. 하층부를 이루는 다섯 개의 패널에는 성주간의 장면들이 담겨 있다. 왼쪽에서부터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의 발을 씻는 장면, 최후의 만찬,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가 차례로 조각되어 있다. 내용은 예수의 수난을 담은 것이지만 이 황금빛 조각과 장식에서는 그 어떤 고난도 느껴지지 않는다. 예수의 고난이 장식의 소재로 쓰이면서 어느덧 고난은 사라지고 환상만 남았다.

성당의 왼쪽 트랜셉트에 부속되어 있는 레이디 채플(Lady Chapel)은 영화 ‘엘리자베스: 황금시대’를 촬영한 곳이다. 영화에서는 이곳을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레이디 채플은 일종의 소예배당으로 대개는 규모가 작지만 일리 대성당의 레이디 채플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개방적인 것이 특징이다. 넓은 창문으로 빛이 들어와서 그런지 본당보다 훨씬 밝고 개방적인 느낌을 주었다. 예배당 하부는 다양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조각들은 종교개혁 기간 동안 머리가 잘려나가거나 얼굴이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다. 지금도 그 ‘파괴’ 혹은 ‘개혁’의 흔적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

성당의 위층 복도에는 스테인드글라스 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은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중세에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에서부터 현대에 만들어진 유머러스한 주제의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영국의 엘리 대성당의 내부 모습. /사진제공=진회숙


일리 대성당를 찾은 날에는 마침 성당에서 사이언스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성당에서 사이언스 페스티벌을 열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동안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종교는 과학을 배척했고, 과학은 종교를 배척했다. 그런데 일리 대성당은 이렇게 서로 상극인 과학을 품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매해 5월 말에서 6월 초까지 계속되는 페스티벌 기간 동안 각종 전시회와 강연, 음악회, 과학 체험 학습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이번 페스티벌의 주제는 인간이 달에 착륙한 지 5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달’로 정했다고 한다. 성당 한가운데에 걸려 있는 거대한 달 모형이 인상적이었다. 직경 7m에 이르는 이 달 모형은 NASA의 달 표면 이미지를 50만분의 1로 축소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모형의 1㎝가 실제 달에서는 5㎞에해당하는 셈이다. 수백 년을 이어온 고풍스러운 건축물 한가운데 떠 있는 거대한 달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우주와 시간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리 대성당에서는 사이언스 페스티벌 외에도 절기마다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6월 말에는 전국의 플라워 디자이너들이 참여하는 플라워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전국 38개 플라워 클럽에서 온 220여 명의 플로리스트들이 참여해 환상적인 꽃의 향연을 펼친다. 페스티벌은 사흘 동안 계속되는데 이 기간 동안 무려 2만 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리 대성당은 복합 문화공간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만나 소통하고, 이벤트를 즐기고,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문화체험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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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0 17:43:11시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