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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죽음, 두려워말고 맞서라

■사랑, 죽음 그리고 미학- 죽음과 평등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공포로 저항의지 상실케하는

죽음의 '메두사 효과' 이기려면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말고

현실 직시하고 당당히 맞서야

루벤스 메두사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끔찍한 괴물들 가운데 메두사가 있다. 메두사의 머리카락 한올 한올은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들이고 매서운 눈초리와 마주치는 것들은 모두 돌로 굳어버린다. 여기에서 메두사는 공포의 화신으로 이해된다. 무시무시한 대상을 만날 때 전율이 감돌다가 이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상대보다 전투력이 크게 부족하지 않더라도 일단 상대의 시선에 제압당하면 심신이 마비되어 제대로 싸울 수 없다. 그래서 전사들은 초반에 기선 잡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동물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눈을 치뜨고 갈기를 올려 덩치를 커다랗게 만들고 우렁차게 포효함으로써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주려 한다. 이처럼 공포로 인해 위축되고 마비되어 저항 의지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을 ‘메두사 효과’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상대가 무지막지한 괴물이고 더 나아가 죽음의 화신이라면, 이런 상대에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첫 번째 방법은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 도망칠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죽음 자체와 같이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에 속한 경우는 안전한 피난처가 없다. 정해진 인생, 사각의 링 안에서 싸워야만 한다. 도망갈 수 없을 때 쓸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이 바로 ‘페르세우스 전법’이다. 신화 속에서 페르세우스는 거울 역할을 할 수 있는 청동 방패를 가지고 괴물을 찾아간다. 메두사의 시선을 직접 응시하지 않고 방패를 들이댄다. 메두사는 방패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마비된다. 상대에게 주려던 공포를 자신이 되받는다. 사신(死神)을 만나는 방법은 거울로 비춰서 죽음에 죽음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포를 되돌려 주는 것이다. 죽음을 대하는 최후의 방법은 죽음이 죽음을 볼 수 있도록 죽음의 환영을 창작하는 길이다.

눈 덮인 일본 홋카이도의 한 주택/니드픽스닷컴


김수영은 ‘페르세우스 전법’을 숙지하고 있던 시인이다. 그의 유명한 시 ‘눈’(1956)은 이렇게 시작된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순백의 차가운 눈이 시적 화자에게는 살아있는 듯 보인 것일까. 하늘 저 멀리에서 추락했으나 눈은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새벽이 지나도록’ 눈은 여전히 그대로다. 차가운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시인은 눈이 살아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눈을 ‘스노우’(snow)로 이해했다. 마당에 떨어진 눈을 백설의 이미지로 상상했기 때문이다. 이 해석 방향에서 ‘눈은 살아 있다’ 또는 ‘눈더러 보라고’라는 표현은 일상에서는 쓰이지 않는 시적 비유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 방향도 가능하다. 즉 눈이 동음이의어 눈(eye)일 수 있다.



시인은 눈이 살아있다고 말한다. 마당에 굴러다니는 살아있는 눈동자는 그 이미지만으로도 낯설고 끔찍하다. 그래서 어색한 비유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유 역시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눈을 이렇게 해석하면서부터, 조금 전까지 ‘눈더러 보라고’ 같은 비유는 더 이상 비유가 아니게 되며, 대신 ‘떨어진 눈’이 시적 비유가 된다. 이제 김수영의 눈을 죽음의 눈, 메두사의 눈이라고 가정해보자. 죽음의 눈은 살아있다. 지상에 목숨이 붙어 있는 것들 가까이에 있다. 대개 우리는 그 눈의 살아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무서워서 그 시선에 눈 맞추지 못한다. 하지만 시인이라면 그 눈에 시선을 맞춰야 한다. 눈맞춤의 전율에 몸을 맡겨야 한다.

죽음의 눈을 응시하는 자가 시인이다. ‘살아서 한편 한편의 시를 통해 죽음을 완료’하는 이가 시인이다. 신이 아닌 인간의 창조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수반한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선취하여 끊임없는 생의 차이를 산출하는 방법 이외에 뾰족한 창작법은 없다. 창조를 위한 죽음, 시적 죽음이 김수영이 죽음에 맞선 대처법이다. 인용된 시에서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는 일상에 빠져 사는 우리다. 우리가 죽음을 외면하고 망각하는 동안에도 죽음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 죽음의 눈을 응시한다는 것은 시인의 눈망울에 죽음을 되비쳐 준다는 뜻이다. 페르세우스처럼 시인은 언어를 거울삼아 죽음을 비춘다. 언어에 스민 죽음의 그림자가 시인의 기침과 가래, 다름 아닌 시어다. 꼭 젊은 시인이 아니더라도, 죽을 것 같은 불안에 진저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최후의 배수진 페르세우스 전법을 권한다. 이런 태도다. ‘죽음아, 나도 죽어가고 있어. 그러니 공포는 네게 되돌려줄게. 미안.’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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