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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빛바랜 사진 속 남자손, 사랑을 말하다

■사랑, 죽음 그리고 미학

-구멍과 비둘기: 아버지의 사진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아버지의 사진. 그의 품에 안겨있는 갓난 아이가 필자다. /사진제공=김동규




비탈진 곳에 아파트를 지을 때, 보통 비탈을 깎고 커다란 시멘트벽을 두른다. 그 벽 때문에 비탈의 흙은 쏟아져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은 구멍들이 이곳저곳에 뚫려있다. 아마 땅속에 물이 고여 그 하중으로 벽이 허물어질까 봐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벽을 세워 무언가를 막으려 할 때도 안팎을 관통하는 구멍은 필수적이다.

도로 면에 세운 시멘트 옹벽


어느 겨울날, 그런 시멘트벽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난 작은 구멍에서 물이 조금씩 흘러내렸고, 땅바닥에 패인 작은 물웅덩이에서 비둘기 한 마리를 발견했다. 비둘기는 참 맛있게 물을 먹고 있었다. 시골처럼 실개천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도심의 비둘기는 이런 물이라도 마셔야 한다. 물론 먹이는 지천으로 널려 있다. 간밤 취객이 내뱉은 길 위의 구토물을 비롯해 온갖 음식 쓰레기들이 즐비하다. 누군가 길고양이를 위해 놓아둔 먹이를 비둘기 떼가 달려들어 순식간에 먹어치운 모습도 본 적이 있다.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뒤뚱거리며 걷는 새의 모습이 오히려 애잔해 보인다. 문득 비둘기가 도시인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례 없이 풍부한 영양분이 공급되면서 굶주림보다 비만을 걱정하지만, 정작 심신이 고양되는 청량한 물 한 모금은 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 빛바랜 낡은 사진 한 장이 있다. 한 남자의 품에 안긴 아이가 필자라고 한다. 당연히 내 기억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광경이다. 아기 때이기도 하거니와, 부친이 세상을 뜨신 후 최근에야 이 사진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책갈피 어느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사진은 남의 집 사진처럼 낯설기만 하다. 누님의 귀엽고 앳된 모습이 중앙 하단에 보이고, 그 위에 아버지가 나를 안고 계신다. 어머니 말로는 도봉산으로 소풍을 나갔을 때의 한 장면이란다. 젊으셨을 때 사진 속 아버지는 선글라스를 자주 착용했다. 아마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모양이다. 사진 속에서 입을 앙다문 아버지가 한 손으로 나를 붙들고 있다. 웃는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이 아빠의 큰 손 위에 살포시 얹혀있다.

롤랑 바르트/위키피디아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이란 책에는 사진의 ‘구멍’이 등장한다. 바로 그 유명한 푼크툼(punctum)이다. 이 라틴어는 작은 구멍, 뾰족한 도구에 의한 상처를 뜻하는 말이다. 바르트는 이 용어를 스투디움과 한 쌍으로 묶어서 사진을 해명하는 열쇳말로 사용한다. 먼저 스투디움(studium)이란 어원상 공부 또는 학습을 뜻하는 ‘스터디’(study)와 관계된 말로서 배워 알고 있는 부분을 뜻한다. 즉 지식과 교양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영역을 가리킨다. 대개 정보전달이 쉽도록 양식화되어 있다. 아버지의 사진에서는 선글라스가 스투디움이라 할 만하다. 당시의 양식화된 유행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스투디움에서 받는 느낌은 인식 범주에 길들여진 것으로서 기지의 것을 재인식하는 데에서 오는, 비둘기처럼 평온한 즐거움이다.

반면 푼크툼은 스투디움의 익숙함을 깨뜨린다. 혹은 밋밋한 스투디움에 생기 넘치는 박동을 불어 넣는다. 스투디움처럼 사진을 보는 이가 찾고 발견하는 게 아니라, 푼크툼이 감상자를 급습한다.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서 감상자를 꿰뚫는다. 살을 파고드는 이 아픔이 역설적으로 강렬한 감동을 남긴다. 이를 통해 감상자는 자신의 고정된 시각이 변화됨을 느낀다. 그리고 사진은 매개로서의 위상을 버리고 사물 자체가 된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말해주고 있듯이, 이미지가 한갓 매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운 생동하는 실재가 되는 기적 같은 경험을 푼크툼이 선사해준다. 요컨대 푼크툼은 앎 속의 신비(무지), 인공 속의 자연, 환상 속의 실재가 드러나는 장소로서, 마치 고대인들이 우주를 감싼 검은 휘장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 빛나는 별이 된 거라 상상했듯이, 일상의 베일에 뚫린 구멍, 그로부터 삶의 진실이 내비치는 작은 구멍이라 하겠다.

그럼 소풍 사진의 푼크툼은 어디일까. 그건 바로 아기의 가슴에 놓인 남자의 ‘손’이다. 다소곳이 무릎에 올려놓은 순종적인 손(근대 규율 사회에서 훈육 된 남성의 손)이 아니라, 아들을 꼭 붙들고 있는 억센 손이다. 그 미더운 손은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한 남자의 손이다. 동굴에서의 가족 만찬을 위해 돌도끼를 움켜쥐고 사냥감을 쫓던 원시인의 손이자, 온종일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오늘날 아버지들의 손이다. 그 손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며온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이 아프게 밀려온다. 신기하게도 이런 고통 이후엔 청량하고 신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시멘트벽 구멍의 물을 마신 비둘기처럼.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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