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를 지나게 된다. 한 마을에 들어서니 나병 환자 열 명이 예수에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울부짖었고 예수는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치료된 몸을 보이라”고 말했다. 나병 환자들이 예수 말대로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나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며 감사를 드렸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고 사마리아인이었다. 예수는 “열 명이 다 치유되었을 텐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갔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며 한탄했다 한다.
나병은 나균이 피부·호흡기·말초신경 등 전신에 퍼지면서 피부에는 결절과 발진이 생기고 통각 소실로 인해 피부가 문드러지며 손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병이다. 보기에 흉측하고 전염력이 있기 때문에 고대사회에는 죄인 취급을 받았으며 정상인들과 격리돼 그들끼리 살아야 했다. 당시에는 치료법이 없어 흉측한 몰골로 서서히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무서운 질병을 말 한마디로 치유했는데도 감사 인사를 하러 온 사람은 열 명 중 단 한 사람뿐이었고 그것도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예수가 보기에 얼마나 한심했으면 나머지 아홉은 어디 갔느냐며 한탄했을까.
로마의 사상가 키케로는 감사야말로 최고의 미덕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주변에는 도움을 받고도 감사를 표시하기는커녕 도움 준 사람을 궁지로 모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아라’ 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인지. 2년 전 젊은 여성이 한의원에서 봉침시술을 받고 알레르기 쇼크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환자의 유족들이 해당 한의사는 물론이고 환자에게 응급처치를 해준 같은 건물 가정의학과 의사에게도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의사가 응급처치를 잘못해서 사망에 이르렀기 때문이라는, 선한 의지로 응급처치를 해준 의사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도 법원은 의사에게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필자도 비슷한 사례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한 고객이 다른 병원에서 울퉁불퉁하게 잘못 시술된 이마 필러를 녹여달라며 병원을 찾았다. 필러 녹이는 시술을 했고 1주일 후 이마는 매끄럽게 좋아졌는데 녹이지 않은 볼이 처지며 피부가 얇아졌다고 한다. 치료 전후 사진을 아무리 비교해봐도 꺼지거나 처진 데는 없는데 자기 얼굴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는 주장이었다. 필자가 책임져야 한다고 고성을 지르며 계속 막무가내 주장을 해서 결국 경찰을 불러 겨우 수습한 적이 있다.
반면 필자에게 시술 후 감사를 표하는 고객도 있다. 필러 시술은 꺼진 부분을 채워서 골진 주름을 펴주고 울퉁불퉁한 얼굴윤곽을 부드럽게 해줄 뿐 아니라 꺼진 다크서클도 개선한다. 그래서 필러 시술 후 바로 그 자리에서 거울로 자신의 달라진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어디 잘못된 곳은 없는지 유심히 거울만을 쳐다보지만 몇몇 사람들은 거울을 보는 순간 화들짝 놀라면서 “딴 사람 같아요” “마술 같아요”라며 격하게 감동을 표현하기도 한다. 필자에게 이런 중독성 있는 감사의 말 한마디는 충분한 감동을 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승이다. 미국에서는 하루 확진자가 무려 7만명 이상 발생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방역으로 전환될 정도로 확산세가 꺾였다. 그 이면에는 진료 현장의 최일선에서 답답한 방역복을 입고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의 노고가 크다. 감사와 존경을 나타내는 수어로 의료진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덕분에 챌린지’에 많은 국민이 동참하고 있다. 코로나19 진료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필자도 고생하는 동료 의료진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덕분에 필러를 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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