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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다산과 강진의 만남 代를 이은 인연으로 결실 맺어

유배지에서 18년 거쳐간 흔적들

주막·초당·차밭 유적으로 남겨둬

고향 돌아간 뒤에도 강진과 인연

다신계 맺고 100년 넘게 이어와

유배지 악연 아닌 인연으로 결실

강진 읍내에 위치한 사의재 앞 마당이 푸른 수국과 화초들로 화사한 모습이다.




다산 정약용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 있다. 바로 ‘남도 답사 일번지’라고 불리는 전남 강진이다. 그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18년은 기나긴 고난의 시작인 동시에 그를 조선 최고의 학자로 거듭나게 한 시간이었다. 다산은 이곳 강진에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 600여권의 저서를 집필하며 학자로서 황금기를 보냈다. 다산만 강진 덕을 본 것은 아니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시골 마을이던 강진은 그가 다녀간 뒤로 조선 실학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면서 명소로 거듭났다.

여행자들이 다산이 남긴 흔적을 따라 그의 고향 남양주 대신 강진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마시던 차(茶)는 국내 최초의 차 상표로 등록됐고 그가 머물던 곳들은 지역 대표 문화재로 지정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다산과 강진은 질긴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다산의 흔적들을 되짚어보는 과정이 바로 강진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사의재(四宜齋)부터 다산초당(茶山草堂), 월출산까지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 강진을 둘러봤다.

강진여행은 다산이 강진에 도착해 처음 묵은 사의재에서 출발한다. 다산이 총 18년 유배생활 중 처음 4년을 지낸 곳이다. 1801년 겨울 강진으로 내려온 다산은 주막 골방에서 술에 취해 허송세월을 보내다 어느 날 주모가 던진 한 마디에 마음을 다잡고 사의재라는 당호를 내건다. 생각·용모·언어·행동 네 가지를 올바르게 한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었을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경세유표·상례사전 등을 집필했고 6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주모와 그의 딸은 다산이 머무는 동안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강진 읍내에 위치한 사의재는 2007년 복원됐다. 사의재는 방 두 칸짜리 작은 초가집으로, 주막의 안채로 쓰이던 공간이다. 아담한 크기의 마당에는 동천정(東泉亭)이라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조성됐고 그 옆으로 수국이 심어졌다. 사의재 바깥채인 주막에서는 아직도 관광객들에게 파전과 막걸리를 팔고 그 주변으로는 저잣거리가 조성돼 당시를 재현한다.

‘천 명이 술에 취해 떠드는 속에/단정한 선비 하나 의젓하게 있고 보면/그들 천 명이 모두 손가락질하며/그 한 선비야 미쳤다고 한다네.’ 사의재에 걸린 다산의 시 ‘우래(憂來)’를 통해 대역죄인의 신분으로 타지에서 홀로 지내던 다산의 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다산초당길은 소나무와 삼나무 등으로 숲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어 나무와 바위 곳곳이 이끼로 뒤덮였다.


다산초당 가는길.


강진 읍내를 벗어나 남쪽으로 가는 길은 이름도 다산로다. 길은 다산이 유배생활 중 가장 오랜 시간 머문 다산초당으로 안내한다.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이곳저곳을 떠돌이 신세로 지내던 다산이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다. 600여편에 달하는 저서 대부분을 이곳에서 썼고 제자 18명을 길러냈다. 다산이 떠난 뒤 200년 가까이 방치됐던 곳을 강진군이 1970년대 들어 복원했다고 한다. 원래는 작은 초가집이었는데 커다란 기와집으로 재건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지적도 있다. 다산초당 옆으로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둬둔 작은 연못 약천(藥泉)이 있는데 사의재 연못보다는 크고 화려한 게 이 시절 다산의 형편이나 마음이 전보다는 여유로워졌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나무 뿌리가 흙을 뚫고 나와 뒤엉켜 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10분 남짓이지만 가파르고 험난하다. 소나무와 삼나무·가시나무 등이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못할 만큼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바닥에는 땅을 뚫고 밖으로 나온 나무뿌리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어 다산의 굴곡진 삶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걸은 뒤 ‘뿌리의 길’을 노래하기도 했다. 이 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어떻게 10년이나 지냈을까 싶지만 다산초당 옆 천일각에 올라서면 그런 생각이 단번에 사라진다. 다산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로 멀리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와 갑갑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다.

초가집이었던 다산초당은 복원되면서 웅장한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숲속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잘 드는 곳이기도 하다.


천일각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가면 천년고찰 백련사로 이어진다. 백련사는 다산의 유배생활 중 유일한 벗 혜장선사가 있던 곳이다. 둘은 이 길을 수시로 오가며 차를 통해 교유했다고 한다. 다산(茶山)은 차나무가 많던 만덕산의 별칭인데 후에 정약용의 호가 된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다산초당으로 올라오는 길보다 험하고 멀어 다산초당 입구에서 차를 타고 5분 거리인 백련사주차장으로 이동하는 게 수월하다. 백련사 길은 늦겨울부터 봄까지는 동백꽃으로도 유명하다.

국내 최초의 차 상표인 백운옥판차는 200년 전 다산이 마시던 전통방식 그대로 만들어진다.


차(茶)는 유배생활 이후에도 강진과 다산이 인연을 이어가는 연결고리가 됐다. 다산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면서 제자들과 다신계(茶信契)를 맺었다. ‘차로 신의를 지키는 계’라는 의미로 제자들이 매년 봄이면 월출산에서 수확한 야생차나무 잎으로 차를 만들어 스승에게 보내며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를 이어왔다. 이 약속은 그들의 후손을 통해 100년 넘게 지켜져왔다. 현재 월출산 인근에는 다산의 막내 제자 이시헌의 후손이 운영하는 이한영전통차문화원이 영업 중이다. 다산이 강진 1경으로 꼽은 월출산 옥판봉 인근 야생차나무에서 딴 찻잎으로 만든 차를 맛볼 수 있다. 그의 선조가 다산에게 보낸 200년 전 방식 그대로를 고수하고 있다.

월출산 기슭에는 대규모 녹차밭이 조성돼 있다.


찻집 인근 월출산 기슭에는 현재 대규모 차밭이 조성돼 있다. 차밭 인근에는 호남 3대 정원으로 불리는 백운동 원림(명승 제115호)이 자리했다. 조선 중기 문인 이담로가 조성한 곳으로 다산이 하룻밤을 머물며 시 ‘백운동 12승경’을 쓰고 초의선사에게 그림 ‘백운동도’를 그리게 했다는 곳이다. 다산의 제자 이시헌과의 만남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이담로의 6대손 이시헌은 자신의 집에 들른 다산에 눈에 들어 사제관계를 맺었다. 지금은 그의 후손이 거주하며 다산이 머물다 간 사랑채 취미선방(翠微禪房)을 비롯한 건물과 자연 등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이지만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과 하나가 됐다.
/글·사진(강진)=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

백운동 원림은 수백년간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집과 정원이 구분없이 하나로 연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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