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쌀쌀한 기운에 이불을 꽈악 끌어당기는 일은 잠결 무의식 상태의 본능 같은 행동이다. 기온 변화에 반응하는 생(生)의 확인이다. 제 몸이 눌렀든 혹은 옆 사람이나 물건에 눌린 이불은 한순간 팽팽해졌다가 숨 내려앉듯 스르르 몸을 휘감는다. 프랑스 유학 후 유럽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재불작가 박인혁의 신작들에는 그 같은 살아있음의 흔적이 역력하다. 종로구 자하문로 웅갤러리에서 한창인 개인전에 선보인 26점의 작품들이다.
하나같이 새하얗다. 석고로 만든 부조 작품인가 싶지만 소재는 천(패브릭)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의 부드러운 옷 주름에서 영감을 얻어 언젠가 작업해봐야지 했었는데, 코로나19로 혼돈의 시간을 겪으며 그간 미뤘던 것을 시도해 봤습니다. 캔버스, 이불, 솜 같은 것들로 재료 연구를 했어요. 그 위에 얇은 천을 덮은 후 아크릴 미디엄을 넣어 서서히 굳히는데, 굳기 전에 내 손과 온 몸을 이용해 굴곡과 주름을 만듭니다.”
주름의 틈새는 마치 고고학자가 붓으로 흙을 털어내듯 섬세하게 흰색을 채웠다. 휘몰아치던 작가의 에너지가 작품 속 소용돌이가 됐고, 감상자는 그 움직임과 멈춤 사이의 팽팽하고도 평온한 긴장감을 음미하게 된다. 그저 흰 빛뿐이건만 그 안에서는 적막 속 바스락거림, 새벽 한기 속의 온기와 살 냄새 등이 공존해 공감각적 자극을 더한다. 작가는 “빛과 반응했을 때 명암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게 흰색”이라며 “부조 같은 조각임에도 비틀고 뒤틀린 느낌이 생생하고, 어떤 면에서는 식물이 자라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추상화인 듯 하나 작품에는 다층적 의미가 스며든다. 할머니의 유품인 솜이불을 이용한 작품에는 ‘할머니의 자화상’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누군가 누웠던 솜 위의 흔적이 고요한 숨 같기도 하고 포근한 구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름진 침대 시트 같은 작품에서는 머물렀던 사람의 표정 주름이 떠오른다. 몸을 휘감았던 천들이 피부로 되살아나 얼굴을 은유하는 셈인데, 이는 작가가 그간 선보였던 어둑한 색조의 인물화와 접점을 이룬다.
전시 제목은 ‘하양의 운율’. 시 같고, 노래 같고, 춤 같기도 한 묘한 진동이 감지된다. 12월 5일까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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