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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군홧발에 처참히 짓밟힌 '블러드랜드'를 기억하라

■피에 젖은 땅-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글항아리 펴냄

히틀러-스탈린 힘 겨루기 과정서

'정책'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 조명

식인 행위로 이어진 '기근 학살'에

살인 할당 더 달라는 수용소 간부 등

'불편하지만 알아야할' 역사 생생히

스탈린 정권의 대량 숙청이 자행 됐던 모스크바 외곽 부토보 지구에 희생자들의 사진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는 1937년에서 1938년 사이 2만762명이 정치, 종교 등의 이유로 총살 당했다. /EPA연합뉴스




전쟁은 승자의 역사다. 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자들에 대한 기록과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 승자의 관점에서 어떤 죽음은 크게 부각되는 반면, 또 다른 죽음은 버려진 땅 깊숙한 곳에 파묻혀 허망하게 잊혀져 간다. 가까스로 살아 남은 이가 억울한 죽음의 증언자로 나서기도 하지만 힘 없이 살해 당한 자의 목소리는 늘 희미하다. 이는 동서고금 모든 전쟁터에서 벌어져 온 일이다. 하지만 현대사에서 최단 기간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에서는 너무 많은 죽음이 소홀히 처리 됐다.

그 희생자들은 ‘너무 많아서’ 무미건조한 하나의 숫자로 치환되곤 한다. 또는 ‘홀로코스트’라든가 ‘아우슈비츠’, 히틀러의 광기’ ‘스탈린의 만행’이라는 짧은 상징적 표현 속에 묻혀 버린다.

죽음에 대한 기록을 그런 방식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직접 현장으로 간 학자가 있다.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다. 중유럽·동유럽사와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인 스나이더 교수는 숫자가 어마어마하다고 해서 각 개인이 죽음에 이른 과정이 소홀히 다뤄져선 안된다는 학자적 신념과 집요함으로 2차 세계대전 관련 기록 보관소 16곳을 샅샅이 들여다 봤다. 영어, 독일어는 물론 이디시어, 체코어,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등 무려 10개 언어로 된 기록물을 섭렵했다. 그 결과물이 2010년 전세계 유수의 도서상을 휩쓸고 2013년 한나 아렌트 상까지 수상한 ‘피에 젖은 땅(Bloodlands)’이다. 첫 출간 이후 20여 개국에 소개됐지만 한국에서는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글항아리를 통해 번역·출간됐다.

폴란드 출신의 한 남성이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2차 세계대전 도중 소련군에 의해 사망한 폴란드 장교들을 추모하며 기념비에 초를 켜고 있다./EPA연합뉴스


스나이더 교수가 말하는 피에 젖은 땅, ‘블러드랜드’는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에 이르는 지역이다. 모스크바와 베를린 사이, 즉 나치 독일과 스탈린 소련의 악랄한 힘 겨루기가 벌어졌던 동유럽 일대다.

스나이더 교수가 블러드랜드에 집중한 이유는 무고한 희생자가 가장 많았음에도, 이들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자의 시선 밖으로 내쳐졌다는 점 때문이다. 승기를 들어 올린 연합군은 상륙 후 진군한 패전국 독일과 서유럽 일대의 희생에만 집중했다. 홀로코스트라는 국제적인 집단 기억이 1970년대 들어 등장한 후에도 초점은 아우슈비츠 등 서유럽인과 독일인의 기억에 맞춰졌다.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블러드랜드에서의 죽음은 현대 유럽사에서 결과적으로 가볍게 다뤄졌다.

책에 따르면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블러드랜드에서는 1,400만 명이 죽었다. 블러드랜드의 희생자들은 전쟁의 포화로 죽은 게 아니라 히틀러와 스탈린의 정밀한 대량 학살 정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무장한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여성, 어린이, 노인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대인 박멸’을 외쳤던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당시 독일의 유대인 인구는 1%도 되지 않았다. 히틀러의 인종 청소는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본격화했다. 히틀러는 비유대인 엘리트 등에 대한 말살 정책도 거침 없이 자행했다.



나치 독일의 만행에 비해 역사적 조명을 덜 받은 스탈린의 민족 대학살 정책도 이곳에서 잔혹하게 벌어졌다. 특히 폴란드계 소련인이 처참하게 말살 당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에서 300만 명을 의도적으로 굶겨 죽이기도 했다.

1939년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이 민간인들을 총살하는 장면./위키피디아


스나이더 교수는 나치와 소련이 자행한 만행을 정확한 통계와 수치로 산출해 연대기 순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불편하지만 기억해야 할 죽음의 순간들도 하나 하나 찾아내 다시 기록했다. 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흔했던 식인 행위라든가 트레블린카 집단 수용소 가스 살해와 시체 처리 과정 등에 대해 소름 끼치도록 자세하게 묘사한다.

희생자에 대한 기록에 그친 것은 아니다. ‘살인 할당량을 더 늘려 달라’고 상부에 요구한 수용소 관리들의 행태와 ‘단지 없애라’는 상부의 명령을 상상 이상의 잔혹한 수법으로 실행한 자들의 인간 이하의 면모도 기록으로 남겼다. 700페이지가 넘는 책 안에는 냉철함을 잃지 않으려는 스나이더 교수의 학자적 노력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분노할 수 밖에 없었던 흔적이 묻어 있다.



스나이더 교수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광기와 만행을 ‘이해 불가능한 일’로 여겨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해를 포기하는 건 역사를 버리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무고한 죽음을 큰 숫자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는 이들의 죽음을 ‘작은 희생’ 정도로 치부했던 히틀러와 스탈린과 다를 바 없다고 엄중하게 말한다.

불편하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을 무겁게 여기며 그들의 희생 과정을 제대로 되새기는 일이야말로 비극적 역사의 반복을 막는 일이라는 것이다. 4만4,000원.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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