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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세이] '녹두꽃'의 세상이 '조선구마사' 통해 피었네





사극을 참 좋아한다. 유명하지만 세세히 알 수 없는 이야기, 혹은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과 그의 이야기, 잊혀진 시간, 소외받은 땅, 조명받지 못했던 사람들. 그들이 섞이고 뒹굴며 만들어낸 한 줄의 역사가 끝내 가슴과 머리를 띵 하게 울릴 때, 그 순간을 참 좋아한다.

사극이 사랑받는 이유는 ‘과거의 결과가 전하는 오늘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2019년 SBS ‘녹두꽃’ 방송을 앞두고 신경수 PD의 라운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이다. 동학이, 민초들이, 그리고 백이강과 백이현 형제의 삶이 끝내 희망 한자락을 손에서 놓지 않아 많이 고마웠다. 실패한 혁명이었으나, 그 혁명이 사람들 가슴에 아로새긴 촛불은 부정한 세상을 만날 때마다 활활 불타는 횃불이 되어왔음을 짐작했다.

‘조선구마사’는 기존에 없던 판타지 퓨전 사극을 표방했다. 우리나라에서 사극을 분류하는 장르는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현하려는 정통사극, 사실에 재미요소를 더한 팩션사극, 시대를 차용하고 상상력을 입힌 퓨전사극 등 세가지였다. 이중 퓨전사극은 실존인물을 차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영화 ‘조선명탐정’이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실존인물에 판타지를 입히겠다는 특이한 발상을 실행에 옮겼다. 새로운 시도는 성공하면 장르의 개척자가 되지만, 실패하면 굴욕을 맛보게 된다. 앞서 살짝 맛보기 했던 tvN ‘철인왕후’는 철퇴를 맞았다. 철종과 주변인물들에 대한 역사왜곡 논란에 결국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살짝 바꿔 피해갔다. 시청률은 높았지만 시청자에게는 신혜선의 요리쇼와 “조선왕조실록 한낱 찌라시네”라는 대사만 각인됐을 뿐이다.



아차 하긴 했겠냐만은 때가 늦었다. 이미 상당부분 제작을 마친 ‘조선구마사’가 비슷한 논란을 피해갈 방법은 없었다. ‘철인왕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특이한 설정을 내놓은 박계옥 작가는 첫 방송 직후부터 ‘조선족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육룡이 나르샤’와 ‘녹두꽃’ 등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신경수 PD에게도 비판이 쏟아졌다. 배우 김동준은 ‘본방사수 해달라’는 글을 올렸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실존인물을 드라마에 다루는 경우 결말이 역사와 같아야 한다는건 룰이었다. 영화 ‘천군’과 ‘명량’, ‘황산벌’ 등이 흥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였다. ‘어떻게’를 가공함으로써 관객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그 인물과 사건을 주목받게 했다. 개봉을 앞둔 영화 ‘자산어보’ 역시 같은 흐름이다.

이런 관점에서 ‘조선구마사’의 선택은 어이없다. 태종 이방원이 환각을 보고 마을 백성들을 도륙한다. 그것도 자신과 아버지의 고향에서. 훗날 세종대왕이 되는 충녕대군은 그때까지 교류조차 없던 서양사람 구마사제에게 제대로 된 인사조차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서서 술까지 따른다. 그리고 한글 창제 직후 6대조의 덕을 기리는 용비어천가를 쓰기도 했던 그가 “6대조인 목조(이안사)께서도 기생 때문에 야반도주하셨던 분이다. 그 피가 어디 가겠느냐”라며 조상을 욕보인다.

사당패 무리는 최영 장군을 두고 “충신? 하이고, 충신이 다 얼어죽어 자빠졌다니. 그 고려 개간나 새끼들이 부처님 읊어대면서 우리한테 소, 돼지 잡게해놓고서리 개, 백정 새끼라고 했지비아니”라고 말한다. 삶의 궤적을 건드려서는 안 될 세종대왕에게, 청렴함의 상징인 최영 장군에게 선을 넘어도 너무 많이 넘었다.



고증은 조선이 아니라 그 당시 중국의 것들을 옮겨왔나 싶을 정도였다. 기생집과 그곳에서 나오는 요리들, 무사들의 검, 궁궐 내부, 무녀의 헤어스타일과 복식, 그리고 한번도 갓을 쓰지 않는 남자들까지. 이렇게만 보면 중국인들이 중국에서 만든 한국 드라마라고 봐도 할 말이 없다.



시청자들이, 아니 방송내용을 알게 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는건 당연했다. 케이블에서 중국 상품 PPL과 역사왜곡을 목격했지만 스리슬쩍 넘어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조선구마사’가 첫 방송부터 선을 세게 넘자 잠시 묵혀뒀던 활시위에 불을 당겼다. 드라마 시청자게시판이, 방송통신위원회 민원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광고나 제작지원을 한 업체의 소비자상담실이 활활 타올랐다. 국민청원은 단 이틀만에 20만명의 동의를 넘어섰다.

이제 ‘조선구마사’를 SBS에서 보는 일은 없다. TV드라마가 2회차만에 편성 취소되는 것은 ‘조선구마사’가 최초다. 아마도 대한민국에 콘텐츠를 유통하는 어떤 채널에서도 그리 큰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촬영장소를 제공해온 지자체와 소품을 협찬한 업체도 손을 끊었다. 제작사 측은 26일 제작 중단 소식과 함께 “해외 판권 건은 계약해지 수순을 밟고 있으며, 서비스 중이던 모든 해외 스트리밍은 이미 내렸거나 금일 중 모두 내릴 예정”이라고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시청자들은 이로써 자신들이 던진 계란이 바위를 깨는 사상 초유의 사건을 목격했다. 드라마 출연자의 문제로 일찍 하차시키거나 조기종영 하는 경우는 이따금씩 있었지만, 시청자 요구로 방송 2회 만에 편성 취소를 결정한 사례는 지금껏 없었다. 제작사 측은 “실존 인물을 차용해 ‘공포의 현실성’을 전하며 ‘판타지적 상상력’에 포커스를 맞추고자 했다”고 해명했으나 기름만 더 부었다. 그 어떤 막장과 자극적 이야기라도 시청률만 높으면 끝까지 끌고 갔던 행태가 처음으로 박살이 났다. 금융치료의 효과가 제대로 통했다.



이제 활시위는 중국 업체의 투자를 받은 작품, 중국 원작을 한국식으로 해석한 작품들에게 돌아간다. 벌써부터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몇 개의 작품이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다. 네티즌은 특히 중국 베스트셀러 원작, 남파간첩과 여대생의 사랑이야기에 주목해 또다시 역사왜곡 문제가 발생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며 화살촉에 다시 불 붙일 태세로 벼르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조선구마사’가 정신을 잃을 뻔 했던 한국 드라마시장에 찬물을 끼얹어준 셈이다. 화가 많이 나지만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다. 무료함과 나태함이 확 달아나게 해줬으니.

/최상진 기자 csj845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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