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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세이] '낙원의 밤' 모든것이 시퍼런 폭풍 앞 바다에서

사진=넷플릭스




내가 세상에서 튕겨나왔다고 생각하던 어리석은 시간을 제주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도피하기에 제주만큼 알맞은 곳은 없었다.

폭풍이 예고된 오후에는 한번씩 김녕 해수욕장 옆 공터에 차를 세워놓고 낮잠을 잤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바다도 하늘도 바위마저도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그게 무슨 색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어둠이 내리는 것인지, 동이 트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찰나의 시간. 오도 가도 못하고 우두커니 홀로 서있는 내 마음과 닮아있었다. 그래서 곧 폭풍이 몰아닥칠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이 편안했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낙원의 삶인지, 체념의 입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폭풍은 곧 거세게 일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경차는 바람에 한번씩 휘청이곤 했다.

비가 오는 제주공항, 초점 없는 눈빛의 남자가 홀로 서있다. 전화가 온다. 약속했던 무기거래상 쿠토(이기영)의 조카 재연(전여빈)이 마중나와 있다. 그 역시 초점없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비가 그친 해안도로에는 아직 해가 비치지 않아 바다가 시퍼렇다.

상대 조직의 스카웃 제의에 응하지 않아 누나와 조차가 무참히 살해된 박태구(엄태구). 그는 그 조직 보스를 죽이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기 위해 잠시 제주에 피신하기로 한다. 재연은 수술해야 살 확률이 10%도 되지 않는 시한부 환자다. 날 선 말로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그럴 시간조차 없다.

사진=넷플릭스


제주에 오면 안 먹어볼 수 없는 물회를 앞에 두고 태구는 쉽사리 수저를 들지 못한다. 소주를 앞에 놓는 재연. 그는 망설이다 입술에 한 모금 맛만 보고 술잔을 내려놓는다. 이들 사이로 여전히 시퍼런 바다가 소리없이 잔잔하게 밀려든다. 이 낙원에 잠시 후 폭풍이 일면 자비는 없을거라고 속삭이듯이.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부르고, 그 복수 직전 계산기를 두드려보게 한다. 손익분기점이 넘어서면 땡큐고, 안 넘으면 최소한 성의는 볼 수 있어야 실행에 옮기는 법이다. 마치 어른의 시선으로 잘못한 아이의 처벌을 계산하듯, 상대 조직의 마 이사(차승원)가 하는 계산은 철저히 실익을 따른다.



“그래서 지금 사형선고 받으신거다?”

재연의 한마디가 태구를 때린다. 살려고 했었던가.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가. 내심 어리석은 희망을 품었는지 모른다. 왜 살려고 발버둥칠 수록 일찍 죽지 않나. 특히 느와르 영화에서는. 소주가 한모금이 되고, 한병이 되고, 두병이 된다. 조력자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어둠이 깊게 깔리고 “이제 어떡하지? 난 이제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재연의 말이 쉬지않고 귓가에서 웅웅댄다.

다시 물회. 죽기 전에 못 잊을 맛이라는. 태구는 다시 재연을 데려가 “못먹기는, 없어서 못먹어”라며 우적 우적 살아있던 것들을 들이킨다. 창가로 잠시 햇살이 비치고, 두 사람은 해변으로 나아가 햇살 앞에서 담배를 문다. 태풍의 눈에 들어선 듯 잠시, 아주 잠시 따스하고 고요하며 평화롭다.

사진=넷플릭스


둔탁한 타격감도, 속도감 넘치는 기술도 없다. 낙원에서의 액션은 갈수록 간결해진다. 덕분에 화려하고 멋지기보다 그저 슬프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마지막 순간을 향해 달린다. 400미터 달리기 쯤 될까. 안정적으로 출발해 탄력을 받고 스퍼트하는, 이야기는 그 마지막 순간만을 위해 직진한다. 덕분에 단 한순간도 졸이는 가슴을 내려놓을 수 없다.

여행 온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겠지만, 그것이 바다의 그리고 제주의 본모습은 아니다. 그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폭풍에 휩싸이고, 고요해지고,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처럼 그걸 편하게 바라보겠지. 그 알 수 없는 푸른 얼굴을 한 ‘낙원의 밤’을. 9일 넷플릭스 공개

/최상진 기자 csj845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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