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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 불법침입자, 엘리트 예술을 할퀴다

■라이언 갠더 개인전 '변화율'

작품 좌대 점령한 기계 고양이

내부자 세상에 온 외부자 표현

공간·맥락 따라 가치 달라지는

속물주의 예술에 '유쾌한 한방'

영국 개념미술가 라이언 갠더의 개인전 ‘변화율’ 전시장 입구에서 볼 수 있는 기계 고양이. /사진 제공=스페이스K




길고양이 한 마리가 미술관 입구에 드러누워 관객들을 반긴다. 숨 쉬는 듯 움직이기도 해서 살아 있는 줄 알았지만 실물 고양이를 본따 만든 기계다. 문제는 고양이가 누워 있는 위치인데, 바로 예술 작품을 올려놓는 좌대 위다. 고양이 주제에 작품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고양이와 함께 있는 좌대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작품명은 ‘현존의 여파, 또는 불법거주자들(고양이 삭스가 조각가 브루스 매클린의 ‘1번 좌대를 위한 포즈작업(1971)’을 만났을 때)’. 브루스 매클린이 과거 예술계의 위계를 풍자하기 위해 본인이 조각 작품인 양 올라가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했던 좌대에 고양이가 누워 있는 것처럼 설정한 것이다. 똑같은 좌대는 아니지만 당시 전시회에 쓰인 것과 똑같은 크기로 만들었다. 원전 격인 작품을 향한 오마주다.

라이언 갠더 ‘변화율’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강서구 마곡동 스페이스K 서울. /사진 제공=스페이스K


길고양이를 만나는 이 전시회는 서울 강서구 마곡동 스페이스K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영국 개념미술계의 젊은 거장 라이언 갠더(45)의 개인전 ‘변화율’이다. 갠더는 미국 뉴욕에 머물 때 한 갤러리에 고양이가 들어왔던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인간이 만든 관습적 기호의 대표 격인 예술 작품에 자연적 기호를 상징하는 고양이가 침입해 들어온 모습이 작가의 눈에는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는 고양이에 대해 “사적·공적 공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외부자이면서 좌대를 점령한 불법 침입자”라며 “내부자의 세상에 들어온 외부자라는 점에서 엘리트적 예술에 날리는 유쾌한 한 방”이라고 말했다.

전시장에는 이렇게 좌대 주위에 누운 길고양이 세 마리가 더 있다. 로티, 타이거, 스모키라는 이름의 길고양이들이 각각 에바 헤세, 수잔 힐러, 조나단 몽크 등 현대의 주요 조각가들이 남긴 논쟁적 작품들이 놓인 좌대를 하나씩 차지했다는 설정이다. 자신이 점령한 자리가 논쟁적이고 역사적인 작품이 놓였던 자리임을 알 리가 없는 기계 길고양이는 현실과 가상, 예술 사이를 잇는 역할을 한다.

어린 시절 자신에 대해 쓴 편지글인 ‘젊은 작가에게’. /사진 제공=스페이스K




전시에는 이외에도 권위 있는 개인·집단이 소통을 위해 만든 관습적 기호, 의도 없이 우연히 소통하는 자연적 기호가 교차하는 다양한 작품들이 있다. 평범한 사물이지만 두 기호가 교차하며 공간과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새로운 상상을 불어넣어 풍자와 위트를 선사한다. 전시장 천장에 떠 있는 듯 보이는 실물 크기의 헬륨 풍선은 사실 고광택 유리섬유로 만든 조각이고,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은 견고한 청동에 채색을 한 작품이다. 홀로그램으로 달걀과 구형 휴대전화의 모양을 구현한 다음 관객들에게 직접 잡아보도록 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도 유도한다.

사물이 놓인 공간에 따라 물건의 가치도 급격히 달라진다. ‘난 다시는 뉴욕에 가지 않을 거야’는 전시장 벽에 난 쥐구멍에 20파운드짜리 지폐를 구겨 넣은 작품이다. 인간에게는 소중한 돈이 쥐에게는 집을 고치는 자재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작가는 미술계에 만연한 엘리트주의와 속물주의를 비판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예술가로 상정해 쓴 편지글을 구겨서 바닥에 놔둔 ‘젊은 작가에게’라는 작품도 있다. 단순한 종이 조각이 미술관에 놓여 있다는 이유로 예술 작품의 지위를 얻은 셈이다.

브로이어의 의자를 뒤집어 놓은 작품. /사진 제공=스페이스K


갠더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주제는 ‘시간’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도 다양한 매체로 시간성을 표현했다. 브로이어, 르코르뷔지에 등 위대한 디자이너들이 만든 의자를 눕히거나 뒤집어 놓고 눈이 쌓인 듯 연출한 작품을 통해 갠더는 권위를 상징하는 의자도 시간이 지나면 쓰러질 수밖에 없으며, 그 의자 주인의 권위도 영원할 수 없다는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했다. 갤러리 옥상에는 자갈에 손목시계를 채운 모양의 검은 콘크리트 조각 작품 ‘우리의 긴 점선(또는 37년 전)’이 설치돼 있다. 갠더가 이번 전시를 맞아 새롭게 만든 이 작품은 평생 자동차 공장 엔지니어로 일한 그의 아버지가 은퇴 기념으로 회사에서 받은 시계와 집 근처 해변에서 주운 자갈을 모티브로 한다. 자연의 조각인 돌과 인간이 조각한 시계를 하나로 묶어 시간의 중요성과 무게를 박제한 모습이다. 전시는 오는 9월17일까지.

라이언 갠더 ‘변화율’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강서구 마곡동 스페이스K 서울. /사진 제공=스페이스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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