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은 경상북도 지자체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중부내륙고속도로와 광주대구고속도로에 바짝 붙어 있지만 국토 개발로 인한 상처를 크게 입지 않아 오랜 세월 품어온 유적과 전통을 비교적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보통 이 정도 거리는 대중교통으로 거점 도시까지 이동해 렌터카를 빌려 취재하는데 이번에는 왠지 카메라와 렌즈·삼각대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트렁크에 장비를 싣고 그대로 고령을 향해 달렸다.
고령을 취재하기로 한 것은 고즈넉한 마을 풍경과 달리 현재 군민들의 마음이 분주하기 때문이다. 아니 분주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앞둔 수험생의 마음처럼 조마조마하다. 고령 지산동의 산등성이에 늘어선 704기의 고분군이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합천 옥전, 창녕 교동?송현동, 고성 송학동, 남원 유곡리?두락리 등 6곳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최종 목록에 선정돼 2022년 등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심사는 벌써 끝나야 했지만 코로나19로 심사관들의 입국이 늦어져 아직 절차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다. 모든 평가와 심사 절차가 완료되면 결과는 2022년 7월경에 발표된다. 고령군청 문화유산과 김기홍 주무관은 등재 전망을 묻는 기자에게 “심사 진행 과정은 일체가 대외비라서 말씀드리기 곤란하다”고 언급을 자제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가야 고분군과 가야의 역사는 우리 국민에게조차 생경한 것이 사실이다. 서기 42년에 태동해 562년 신라에 흡수된 가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해 고구려·백제·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고령 대가야, 상주 고령가야, 성주 성산가야, 김해 금관가야, 함안 아라가야, 고성 소가야 등 6가야는 전북 무주에서 전남 고흥에 이르는 적지 않은 영토를 확보하며 600년간 철기 문화를 꽃피웠던 빛나는 우리 역사의 일부다.
그나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야 문화도 주로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에 치우쳐왔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해 진골의 신분을 보장 받고 자신의 영토를 그대로 다스려 역사가 온전히 전해온 반면, 대가야는 562년 신라군에 멸망한 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베일에 싸여 있던 대가야가 다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7년 고령군 지산동 44·45호 고분을 발굴하면서부터다. 고분에서 순장 덧널(널판을 넣기 위해 짜 맞춘 매장 시설)과 수많은 부장품이 발굴되면서 가야사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후 학계에서는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四國)시대를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고령군도 잃어버린 역사의 복원에 나섰다. 이 같은 사업의 일환으로 고령읍은 간판을 대가야읍으로 바꿔 달았다. 이후 2019년에는 대가야생활촌을 개장해 지역 역사 홍보에 나서고 있다.
고분군을 제대로 조명하려면 맞은편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편이 더 낫다. 카메라 광각렌즈에 담긴 고분군 전체 풍광에서 땅이 품고 있는 오랜 역사가 진하게 느껴진다. 고령군은 이 일대를 트레킹 코스로 단장했는데 주산 남쪽 능성을 따라 704기의 봉분이 모여 있다. 이 고분들은 서기 400년부터 562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대부분 산 위에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런데 고분들은 왜 구릉에 포진해 있을까. 전문가들은 가야인들이 주산을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사를 좀 더 깊숙이 알고 싶다면 인근의 대가야박물관·왕릉전시관을 둘러보면 된다.
고령군에는 가야시대에서 조선시대로 ‘시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선산 김씨 집성촌도 있다. 영남 사림학파의 종조 김종직 후손들의 세거지인 개실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본관이 선산인 김종직은 무오사화로 생을 마쳤지만 김굉필·정여창·남효은·유호인·김일손 등으로 이어지는 쟁쟁한 사림파 제자들을 배출했다. “무오사화에서 살아남은 후손들이 정착해 350년을 이어오고 있는 이 마을에는 60여 가구에 100여 명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거의 20촌 이내 친척들”이라고 개실마을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민규 씨가 전했다. 대부분이 한옥이며, 고택 숙박을 비롯해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글·사진(고령)=우현석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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