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세에 따라 여행 계획을 세웠다가 취소하기를 수차례. 여기에 변덕스러운 날씨까지 더해져 여행을 떠나기 망설여지는 시간의 연속이다. 이럴 때는 코로나19 상황이나 계절에 관계없이 아무 때나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지가 제격이다. 오색 단풍이나 눈부신 설경이 펼쳐지는 시기가 아니더라도 탁 트인 자연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드라이브 여행의 최적지, 424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는 ‘아리랑의 고장’ 강원도 정선이다.
강원도 홍천에서 시작되는 424번 지방도로는 정선과 태백·삼척을 잇는 옛길이다. 문치재·비행기재·마치재 등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고갯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은 곳곳에 그림 같은 풍경을 숨겨두고 있다. 꼬불꼬불 동대천 물길을 따라 이어진 도로 옆을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화암동굴·몰운대 등 화암팔경(畵岩八景)이라고 불리는 절경지가 연이어 펼쳐진다. 아리랑고개 문치재, 100년이 넘은 백전리 물레방아도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들이다.
첫 번째 목적지는 정선 읍내를 빠져나와 424번 지방도로를 갈아타자마자 만나는 문치재다. 424번 도로에서 잠시 샛길로 빠져 지그재그로 이어진 오르막을 오르면 해발 732m 정상이다. 여기부터 급경사의 내리막이 시작되는데 이 구간을 문치재라고 한다. 함양 오도재와 보은 말티재, 흑산도 12굽이길과 함께 손꼽히는 대표적인 고갯길이다. 문치재는 고양산과 각희산·곰목이재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에 둘러싸인 문(門)과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화암면 오산리에서 북동면 무내리로 이어지는 이 길에는 산촌 마을에서 읍내를 오가던 주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차량 소통이 거의 없는 문치재는 계절마다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여행지다. 도로 전망대에서 비스듬히 내려다 보이는 문치재의 S자 코스가 일품이다. 굳이 비교를 해 보자면 오도재나 12굽이길에 비해 경사가 가파르지는 않지만 도로가 꺾이는 정도는 가장 극적이다. 오랜 시간 사진작가들의 촬영지로만 알려져 있다가 최근에는 롱보드 성지로 다시 한 번 유명세를 타고 있다. 문치재는 도로의 폭이 좁아 중간에 차를 세워둘 곳이 마땅치 않고 차를 돌릴 수 있는 구간도 없어 한번 진입하면 고갯길이 끝나는 무내리까지 갔다가 돌아와야 한다.
이제부터는 화암팔경을 구경할 차례다. 출발은 4경 화암동굴이다. 천포광산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1922년부터 금을 캐던 금광이 폐광한 뒤 관광지로 다시 문을 열었다. 갱도 인근에서 천연 동굴이 발견되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는데 길이 1,803m의 동굴 안에는 금광석 채취 과정부터 종유석·석순·곡석·석화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여행객들의 발길이 뜸해진 요즘 화암동굴에 가면 동굴 전체를 거의 전세 낸 것처럼 즐길 수 있다. 동굴 내부 기온이 겨울철 바깥 기온보다 10도 이상 따뜻한 점도 매력이다.
화암동굴을 빠져나와 태백 방면으로 달리다 보면 화암(畵岩)을 뜻하는 ‘그림바위마을’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 이름처럼 주변으로는 1경 화암약수와 2경 거북바위, 3경 용마소가 자리하고 있다. 화암약수는 눈병·위장병·피부병 등에 좋다고 알려진 탄산수인데 톡 쏘는 물맛도 일품인 데다 주변 경치도 아름다워 화암팔경 중 하나로 꼽힌다. 약수터 주변 산책로는 호젓하게 걷기에 그만이다.
본격적인 드라이브는 동대천과 도로가 딱 붙어가는 5경 화표주에서 시작된다. 여기부터 7경 몰운대까지 4㎞에 이르는 길은 ‘소금강’이라고 불리는 화엄팔경의 핵심 구간이다. 해발 1,000m에 가까운 고산들이 겹겹이 둘러싼 협곡 사이로 절경이 펼쳐진다. 출발점에 자리한 화표주는 마치 ‘정선 소금강’의 시작을 알리듯 두 개의 돌기둥이 관문처럼 우뚝 솟은 모양새다. 사람이 쌓은 돌탑처럼 차곡차곡 쌓인 바위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화표주’와도 닮아 있다.
도로는 당장이라도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수직 암벽 사이를 한참이나 돌아간다. 6경 설암을 포함해 소금강로는 경치 좋은 곳마다 쉬어갈 수 있는 전망대를 설치해놓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절경을 꼽으라면 구름도 그 경치에 반해 쉬어간다는 7경 몰운대다. 도로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송림을 따라 5분만 걸어가면 수십 명이 한꺼번에 올라설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반석이 나오고 그 끝으로 수령 500년이 넘는 소나무 고사목 한 그루가 바위 틈을 비집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소나무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다.
다른 곳과 달리 몰운대는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장관이다. 발 아래로 동대천이 크게 굽이쳐 흐르고 주변 마을과 산세까지 한눈에 감상할 수 있어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황동규 시인은 시 ‘다시 몰운대에서’에서 그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저기 벼락 맞고 부러져 죽은 척하는 소나무 / 저기 동네 앞에서 머뭇대는 길 / 가다 말고 서성이는 바람 / 저 풀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몸 매무시하는 구름 /…(중략)…/ 나도 몰래 마음이 뿌리 내린 곳, 뿌리 몇 차례 녹다 만 곳 / 내가 나를 본다 / 더 흔들릴 것도 없이 흔들리는 마른풀, 끝이랄 것도 없는 끝 / 노래 대 하나 뵈지 않게 출렁여놓고.’
이제 화암팔경 중 마지막 8경 광대곡이 남았다. 광대곡은 화암팔경 중 차로 갈 수 없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총 4㎞에 달하는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소도굴·촛대바위·총대바위·영천폭포·바가지소 등 12개의 동굴과 폭포를 만나볼 수 있다. 예로부터 심마니들이 산행에 나서기 전 기도를 드리던 곳으로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깊은 골짜기다.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대신 출발 전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만큼 힘든 구간을 통과해야 한다.
424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사북 방면 28번 국도로 갈아타면 화암면의 맨 끝자락 백전리에 다다른다. 백전리는 정선에서도 가장 외진 오지 산간마을로 대덕산을 사이에 두고 삼척시 하장면 한소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을 찾은 것은 100년 넘은 물레방아를 보기 위해서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1900년대 초 농산물을 가공하기 위해 마을 계곡 옆에 설치된 백전리 물레방아는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물레방아로 기록돼 있다.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안은 물레방아와 해질 무렵 굴뚝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을 풍경이 100년 전으로 여행객의 시간마저 돌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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