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내가 큰맘 먹고 선물한 작품을 논두렁에 버리고 가버린 사람도 있었지요.”
원로 화가 이건용은 지금도 자신의 작품이 고가에 잘 팔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건용은 1980년대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군산대 교수로 재직하며 전라북도 군산에 작업실을 두고 있던 시절이다.
“멀고 먼 내 화실까지 찾아와 준 게 고마워서 드로잉 한 점을 선물했어요. 나중에 집으로 가려고 나섰는데 논 한가운데 종이 한 장이 박혀 있더라고요. 차를 세우고 얼른 가봤죠. 연이 떨어진 건가 싶었는데 내 작품이지 뭡니까. 내던지고 간 거죠. 그날 저녁에 전화해서 ‘액자 해서 잘 붙여두라’ 했더니 ‘액자 하러 갈 시간이 없다’고 받아치더군요. 버렸다는 말은 못하고….”
뒤늦게 재발견된 작가들에게 이런 일은 다반사다. 지금은 억대 작품값을 자랑하는 한 원로 화가는 캔버스에 그린 유화가 방수 효과가 좋았기 때문인지 자신의 작품이 장독대 덮개로 사용되는 걸 목격하고 속상했다는 경험을 들려주고는 한다.
2018년 이전만 해도 이건용의 작품은 대형 경매사의 메이저 경매에 출품되지 않았다. 수요가 적었으니 거래가 활발하지 않았다. 대략 5년 사이 수백만 원대 종이 드로잉, 수천만 원대 캔버스 작품들이 경매에서 10~20배 이상 몸값을 끌어올렸다. 23일 케이옥션 경매에서는 ‘신체드로잉 76-1-2015(130.3×193.9㎝)’가 2억 6000만 원에 낙찰됐다. ‘하트그림’이라 불리는 ‘신체드로잉 76-3-2010’은 시작가 1억 5000만 원에 나와 2억 5000만 원에 새 주인 품에 안기기도 했다.
그림값이 치솟으면 작가의 태도가 변하기 십상인데 이 작가는 한결같다. 택배 상자를 잘라 얻은 종이에 그리는 드로잉이 대표적이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폐지 수집가로 보일 일인데 일부러 택배 상자 폐지를 작업에 활용한다. 버려질 종이에 수천만 원대 몸값을 입히는 일에서 작가는 흐뭇한 보람을 얻는다.
1월 글로벌 화랑 페이스갤러리가 이건용과의 전속 체결을 공식 발표했다. ‘단색화’가 화단을 지배하던 197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홀로 고군분투했던 이건용의 시대가 드디어 도래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