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여야 정쟁에 휘말려 첨단산업 지원책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사이 미국·일본·유럽 등 주요 경쟁국들은 자국 내 기업에 대한 지원을 쏟아내면서 경쟁력을 배가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정부와 의회가 합심해 최근 자국의 첨단산업 보호를 위한 각종 법안을 일사천리로 처리하고 있다. 분야도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등 우리나라 전략산업과 정확히 겹친다.
◇美, 13일 만에 첨단산업 지원법 통과=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 시간) 서명한 이른바 ‘반도체지원법(반도체 칩과 과학법)’은 그 신호탄이다. 총 2800억 달러(약 366조 원)를 들여 미국 내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한 법안이다. 자국 내 산업 경쟁력 확보뿐 아니라 중국 견제라는 목적도 담고 있다. 이 법을 통해 미국 내 반도체 산업에 520억 달러(약 68조 원)를 지원하고 미국 반도체 공장 건설 기업에 25%의 세액공제를 적용한다. 세액공제 지원 효과만 10년간 240억 달러(약 31조 원)로 추정된다. 미국의 첨단 과학 연구 활성화를 위해 향후 10년 동안 2000억 달러(약 261조 원) 이상을 투입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미국 민주당은 공화당과 세부 조항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이번에는 핵심 지원책만 떼어낸 수정안을 지난달 상하원에서 단번에 처리했다.
반도체지원법에서는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도 일부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배터리 분야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바이든 정부는 16일 미국산 전기차와 배터리에 특혜를 주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서명했는데 한국 전기차 업체들에 타격이 예상된다. 이 법은 미국에서 조립되고 일정 비율 이상 미국에서 제조된 배터리와 핵심 광물을 사용한 전기차에만 공제 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았다. 현대 아이오닉5, 기아 EV6 등 전기차를 전량 한국에서만 생산하는 국내 업체에는 청천벽력 같은 법안인 셈이다. 바이든 정부는 공화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당인 민주당과 똘똘 뭉쳐 이 법안을 상하원에서 통과시켰다.
일본 또한 5월 경제안보법을 통과시키며 반도체 산업 생태계 구축에 대한 근거를 마련했다. 여기에 올해 7740억 엔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반도체 산업 지원에 나섰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은 정부와 의회의 협조가 더욱 쉬워 빠른 의사 결정이 가능하다. 여야 정쟁 자체가 없는 중국의 경우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후 불협화음이 없는 지원책 구축을 진행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역시 2030년까지 430억 유로(약 56조 원) 규모의 ‘EU반도체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해 있고 논의가 활발해 조속한 처리가 기대되고 있다.
◇한국은 여야 정쟁에 허송세월=반면 한국은 정부와 국회가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서 표류하고 있다. 반도체·배터리·전기차 등 핵심 산업계에서는 경쟁력 향상을 뒷받침할 정부의 규제 해소 및 지원책 마련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지만 국회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 보니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글로벌 공급망 위기 와중에 민간기업에 세제·금융 등 지원 패키지를 제공하는 ‘공급망 관련 3법’ 제·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에 대응해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생산시설을 확충하는 기업을 정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는 내용이다. 관계 부처 간 협의를 조속히 진행할 계획이지만 문제는 국회다. 정부는 연내 제·개정을 마친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국회에서의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소재·부품·장비 산업 지원을 위한 소부장특별법 개정도 지지부진하다. 다수당인 민주당이 협조할 것이라는 분위기도 감지하기 어렵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안건 또한 정체돼 있기는 매한가지다. 지난 정부에서 발의된 안건이든, 윤석열 정부에서 발의된 안건이든 상임위원회 계류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다. 반도체 등 핵심 산업의 산업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은 21대 국회 개원 후 12개나 발의됐지만 이 중 상임위를 통과한 사례는 하나도 없다. 기술 보호는 여야에서 갈등을 빚을 사안도 아니지만 정치권이 이 법안을 우선순위로 보고 있지 않아 처리 일정이 계속 밀리고 있다.
민주당 소속인 안민석 의원이 4월 대표 발의한 한국인공지능·반도체공과대학교법안 제정안도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상정된 후 논의의 진척이 더뎌 처리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나마 발의라도 된 경우라면 상황이 나은 편이다. 디스플레이 업계에서는 국가첨단전략산업특별법 개정을 통한 산업 지원을 촉구하고 있지만 논의만 무성할 뿐 ‘총대’를 메는 사람이 없다. 첨단산업 인력 확보를 위해 수도권 대학 정원을 늘릴 근본적 방안으로 지목된 수도권정비계획법도 업계에서만 개정 목소리를 높일 뿐이다.
일각에서는 윤석열 정부와 여당 또한 진정한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반응도 나온다. 여당의 의석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 지지율마저 낮아지자 첨단산업 지원 대신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산업은 시간이 중요하기에 법안 통과 시기를 놓치면 나중에 입법해도 의미가 없다”며 “일례로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을 늘리는 부분이 가장 시급한데, 국회에서 법적으로 지원해 주는 게 가장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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