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손쉽게 서울 강남 빌딩이나 앤디 워홀의 작품에 소액 투자할 수 있는 길이 머지않아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가 연내 증권형토큰(ST)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면 이를 토대로 일반 투자금을 모으는 증권형토큰공개(STO) 시장까지 차차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본 조달 창구이자 투자 대안이 될 수 있는 STO 시장 개화를 앞두고 증권사를 필두로 한 전통 금융업계와 암호화폐거래소, 신(新)·구(舊)업권 간 치열한 경쟁과 합종연횡이 예상된다.
◇정부, 연내 ‘증권성’ 가이드라인 발표=21일 정부와 업계 등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어떤 가상자산이 증권형토큰에 해당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연내 발표할 계획이다. 가상자산은 크게 증권형토큰과 비증권형토큰으로 나뉜다. 증권형토큰이란 증권성이 있는 권리를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코인 형태로 발행한 것이다. 증권성 여부는 ‘하우이테스트(Howey Test)’를 주로 따른다. 하우이테스트는 1933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대규모 오렌지 농장을 운영하던 ‘하우이컴퍼니’가 진행한 농장 분양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가 투자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만든 테스트에서 유래된 말이다. 하우이테스트에 따라 △일정 수익을 기대한 투자자들이 △여러 사람이 출자한 기업에 △금전을 투자한 경우 증권성이 있다고 판단하는데 투자자 스스로가 아닌 제3자의 노력으로 투자 이익이 발생하는지가 핵심이다. 비증권형토큰은 증권 성격을 가지지 않은 지급·결제용으로 쓰이는 암호화폐인데, 대표적으로 비트코인 등이 꼽힌다.
증권형토큰으로 분류된 가상자산은 기존 증권과 마찬가지로 발행이나 유통 과정에서 강력한 수준의 규제가 적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투자에 따른 손실이 발생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사기나 시세조작 등 금융 범죄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는 가이드라인을 통해 가상자산을 증권형과 비증권형 토큰으로 나눠 증권형은 기존 자본시장법 규제 내에서 발행과 유통이 이뤄지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증권형 토큰은 블록체인을 활용한 새로운 형태의 자산인 만큼 법 적용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자본시장 윤활유 STO…새 시장 열려=금융 당국이 2018년 모든 형태의 암호화폐공개(ICO)를 금지하면서 국내에서는 현재 STO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정부가 증권형토큰의 가이드라인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이를 기반으로 투자금을 공개적으로 모으는 STO가 허용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STO는 쉽게 말해 ‘쪼개기 투자’에 블록체인을 결합한 것으로 부동산과 주식·채권 등 실물 자산을 담보로 암호화폐를 발행해 증권처럼 거래할 수 있다. 투자자는 STO를 통해 지분과 의결권·이자·수익금 등을 나눠 가진다. 다양한 기초자산의 증권을 손쉽게 거래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 수 있고, 블록체인의 특성상 위·변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STO가 상용화하면 자본시장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STO 시장이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증권사들은 새 먹거리 찾기에 분주하다. 증권업계는 증권 거래를 본업으로 삼아온 만큼 STO 시장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금융투자협회가 증권형 토큰 거래가 가능한 대체거래소(ATS) 설립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금투협은 대형 증권사들과 함께 ATS 법인 설립을 연내에 마치고 2024년부터 거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엄주성 키움증권 전략기획본부장은 “증권형 토큰에 대한 투자 정보가 충분하게 제공돼야 하는데 자산 가치 평가에 특화한 증권사들이 STO 시장에서도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존 암호화폐거래소들은 기대와 우려가 섞여 있는 모습이다. 가상자산이 증권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자본시장법상 투자중개업 인가를 받지 않은 거래소는 취급이 금지될 수 있다. 업계에서는 비트코인을 제외한 암호화폐(알트코인) 일부가 증권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본다. 비트코인은 익명의 인물이 만들었고 화폐 성격에 가깝기 때문에 증권성 논란에서 자유롭지만 다른 알트코인은 백서 내용에 따라 하우이테스트 요건을 충족했다고 평가 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암호화폐거래소들이 증권사를 인수하거나 관련 라이선스를 취득해 본격적으로 기존 증권사와 경쟁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긴장하는 P2E 업계=암호화폐의 증권성 판단 여부는 돈 버는(Play to Earn·P2E) 게임업계에서도 중요한 쟁점이다. 국내 게임사 위메이드는 게임용 가상자산 위믹스를 만들었는데, 8월 위믹스가 사실상 증권에 해당해 자본시장법상 의무를 위배했다는 민원이 제기돼 금융위가 검토에 착수했다. 게임 생태계 규모에 따라 위믹스 가격이 달라져 증권에 가깝다는 게 민원의 요지다. 당국이 위믹스가 증권형이라고 해석할 경우 더 이상 게임 내 활용이 불가할 수 있다. 최근 컴투스와 넷마블·네오위즈 등 대형 게임사들이 잇따라 P2E 게임 시장에 뛰어든 가운데 위믹스의 증권성 판단 사례는 게임사들의 가상자산 사업 향방을 좌우할 것으로 관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