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잠들기 어려운 밤, 캐럴라인 냅의 책을 읽었다. ‘명랑한 은둔자’ ‘욕구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개와 나’라는 책으로 알려진 그녀의 삶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힘겹게 채우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항상 애정결핍에 시달리던 그녀가 ‘마른 몸매’를 갖기 위해 시작한 무리한 다이어트는 그녀를 치명적인 거식증으로 몰아갔고, 거식증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알코올중독을 앓게 되었으며, 알코올중독을 치유하는 과정 속에서 그녀를 구원한 것은 글쓰기와 사랑이었다. 그녀의 거식증은 ‘마른 몸매를 가지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치명적인 상상과 ‘나는 음식에 대한 욕구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그릇된 성취감이 어우러져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욕구들’이라는 책을 통해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그 어떤 갈망으로도 충족되지 않은 우리 자신의 슬픔’과 만났다.
그녀는 이렇게 질문한다. “당신이 한 그릇 더 먹는 건 배가 고파서인가, 아니면 슬퍼서인가?” “운동을 평소보다 30분 더 하는 건 건강과 안녕을 위한 필요성을 의식해서인가, 아니면 또 한바탕 자기를 벌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의 뼈아픈 질문은 내 마음속에서 또 다른 질문의 방아쇠를 당겼다. 우리는 정말로 먹고 싶어서 먹고, 정말로 사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그마처럼 무시무시하게 끓어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해 그 슬픔으로 텅 비어버린 우리 마음을 채우기 위해 눈에 쉽게 보이는 욕구들(식욕, 먹방, 쇼핑 등등)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타인의 욕망(당신은 더 날씬해져야 하고, 더 아름다워져야 하고, 모든 면에서 더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정작 나 자신의 욕망(나는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그냥 투명하게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모든 욕구를 없애버리고 싶은 욕구야말로 성숙한 인간의 자세일까. 그것은 또 다른 자기학대일 수 있다. 캐롤라인 냅은 ‘욕구를 없애버리고 싶은 욕구’가 참이 아니라, 정반대로 ‘욕구 자체에 대한 욕구’, 즉 무언가를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 더욱 건강한 상태임을 깨닫는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도 괜찮다는 마음, 솔직하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도 된다는 안정감, 있는 그대로 나의 갈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건강한 상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까. 요즘의 나는 무언가 소중한 대상을 향해 나를 진실로 다 쏟아붓고 싶은 갈망을 느낀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글쓰기는 어느새 내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어버려서, 글쓰기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을 열망하기 시작한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역사’를 다시 읽다가, 갑자기 울컥해지는 문장을 만났다. “자기를 어딘가에 바치면 그곳은 그만큼을 돌려준다.” 나도 어딘가를 향해 나를 바치고 싶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람을 향해서가 아니라 장소를 향해서. 사람을 향해 바치는 사랑은 저쪽에서 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사람을 향해 일방적으로 사랑을 퍼붓다가는 내가 더 많이 다치는 경우가 많으니. 이제는 장소를 향해 나를 바치고 싶었다. 내가 평생 머물고 싶은 장소를 발견하고, 그 장소에 내 인생을 다 쏟아부어, 언젠가는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공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까지도 언제든 환대할 수 있는 삶을 꿈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의 장소에 나의 이야기를 불어넣어, 내 몸과 내 장소와 내 이야기를 떼어놓을 수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마음껏 원해도, 온 힘을 다해 열망해도, 그것이 결코 어색하거나 부끄럽지 않은, 그런 당당하고 용감한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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