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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 1400년을 우두커니…고도를 기다리며

◆공주·부여·익산, 백제의 흔적을 찾아서

백제인이 한성 잃고 피란한 공주·부여

무령왕릉 유물 쏟아지며 백제문화 주목

빼어난 조형미 정림사지 오층석탑부터

금동대향로·미륵사지에 옛 왕도 숨결

충남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조명에 은은히 빛나고 있다.




고대 백제의 옛 수도의 흔적들을 찾아 전라북도 익산과 충청남도 부여·공주를 가는 길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평야다. 이런 평야에서 산출되는 농업 생산물은 백제가 부강하기 위한 기반이 됐을 듯하다. 공주와 부여에 백제가 수도를 둔 것은 한성을 잃은 475년부터 백제 국가의 문을 닫은 660년까지 180여 년간이다. 백제인들이 급히 정착한 공주가 다소 날것이라면 익산에서는 거의 완벽한 백제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이 시기는 백제가 중국 등 외래문화를 받아들이고 한반도 지역 전통과 융합해 ‘부흥’과 ‘혁신’으로 재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적 정취를 가장 잘 느끼게 하는 백제 문화 코스를 따라가 봤다. 공주와 부여, 그리고 익산의 백제 유적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충남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포함된 송산리고분군 전경.


무령왕릉 모형 전시관을 살펴보고 있다.


충남 공주(백제 당시 웅진)는 백제인들이 한강 유역 한성을 잃고 피란해와 정착한 곳이다. 이후 다소 잊혀졌던 공주가 재발견된 것은 무령왕릉을 계기로 해서다. 원래 공주에는 백제 왕가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송산리 고분군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굴 등으로 대부분 훼손됐다.

하지만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완전한 모습의 무덤이 발굴됐고 이것이 525년 축조 연대까지 정확한 무령왕(523년 사망)의 것으로 밝혀졌다. 금제 관장식 등 4600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와 백제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무령왕릉은 백제가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혁신한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다.

송산리 고분군 입구에 있는 전시관에는 무령왕릉의 실제 모습을 똑같이 재현한 모형 전시관이 있어 관람객들에게 백제 문화를 알린다. 전시관 앞에 있는 다소 귀여운 모습의 진묘수는 무령왕릉의 대표적인 부장품인데 현대 공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무령왕릉을 지키던 진묘수. 송산리고분군 앞에 모형이 전시돼 있따.


또 당시 백제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공산성도 복원돼 주요한 탐방 코스다. 성곽을 돌며 바라보는 금강과 공주 시가지의 모습이 절경이다.

자동차는 금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한 시간여를 달리면 부여(사비)가 보인다. 부여는 백제가 본격적인 비상을 하기 위해 보다 너른 땅으로 옮겨온 곳이다. 부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림사지(터)와 금동대향로다.



부여 정림사지 전경.


정림사지를 들르면 부여의 상징이기도 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탑으로서의 완벽한 균형미와 조형미를 갖춘 채 1400여 년을 견뎌온 ‘역사의 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령왕릉이 땅속에 묻혀 있다가 50년 전에 재발견된 것이라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항상 이 자리에 서서 백제를 상징했다는 것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인근 정림사지박물관은 빈터로만 존재하는 정림사의 퍼즐을 맞춰볼 수 있는 공간이다.

부여에서 반드시 만나야 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백제 금동대향로다. 이것을 보기 위해 국립부여박물관을 찾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병 보호 상자에 둘러싸인 향로를 보기 위해 사시사철 사람들로 붐빈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된 백제 금동대향로를 관람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금동대향로는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한 진흙 수로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깨진 곳 없이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나오면서 우리 고대 공예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 됐다. 대향로의 높이는 62㎝로 원래는 금을 입힌 그대로 황금색이었는데 오랫동안 땅속에서 산화돼 현재는 구리 빛깔이다.

금동대향로의 구조는 아래에 물을, 위에 뭍을 각각 모사하고 있다. 산에서는 신선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대향로의 가장 밑에서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용과 가장 위에서 날개를 펴고 있는 봉황이 인상적이다. 봉황이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날짐승의 우두머리로 더 신앙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의 전경.


다시 남쪽으로 끝없는 들판을 한 시간여 달리면 익산이 나온다. 전북 익산은 비록 공식 수도는 아니었지만 수도에 버금가는 도시였다. 그중에서 익산 미륵사지(터)는 백제의 최전성기를 보여준다. 미륵사는 무왕 때인 639년 창건됐는데 규모는 고대 시대 사찰 중 최대인 6만 5000㎡(약 2만 평)다. 창건 당시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탑(서탑) 하나뿐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절의 규모와 백제의 강대함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원래 24m, 9층탑으로 추정되는데 상당히 무너지고 현재는 일부인 14.5m, 6층까지만 있다. 허물어지고 콘크리트로 칠해진 것을 20년간 보수한 끝에 지난해 깔끔한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미륵사지 석탑(서탑)이 20년간 보수를 마치고 깔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륵사지가 최근 주목을 받은 것은 서탑 보수 과정에 나온 금제 사리봉영기의 글 때문이다. 삼국유사에서 미륵사가 무왕을 노래한 서동요의 주인공인 신라 선화공주의 제안으로 건설됐다고 했는데 사리봉영기 기록에서는 왕비가 백제인인 ‘사택적덕의 딸’로 돼 있다. 이래저래 미륵사는 후대인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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