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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3월 도쿄 벚꽃, 7월 서울 무궁화

민병권 정치부장

윤석열(왼쪽)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한일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 기자회견을 하며 활짝 웃고있다. 연합뉴스




“벚꽃 때문에 이제나저제나 마음 졸여 봄을 기다리네. 제발 한가로운 봄 날이었으면.”

“안개 낀 산 건너편의 벚꽃, 벚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오늘 하루를 보낸다오.”

일본의 고전 시집 ‘고킨슈(古今集)’와 ‘슈이슈(拾遺集)’에 담긴 벚꽃 관련 구절들이다. 일본 고전문학 속 벚꽃 묘사를 살펴보면 한결같이 친구나 정인에 대한 그리움, 한가로운 봄의 찬미, 삶의 무상함과 같은 감정이 엿보인다. 본래 벚꽃에 대한 일본인의 대중적 정서는 이처럼 평화적이고 서정적이었다.

막부시대 후기인 메이지시대부터는 벚꽃을 군국주의적 무사도의 상징으로 비유하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이 같은 벚꽃 상징화의 변용은 태평양전쟁 시기 절정에 달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의 벚꽃을 대할 때 우리 국민들은 서정적 감정과 역사적 위화감 속에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6일 벚꽃을 언급했다. 기시다 총리는 당일 방일한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번 주 도쿄에서는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운을 뗐다. 기시다 총리가 언급한 벚꽃은 무사도 부활의 메타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일 관계 회복을 그리워하는 양국 국민들의 정서를 담은 발언으로 이해된다.



이날 기시다 총리의 후속 발언들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사과 표현이 빠졌다. 대신 과거사에 대해 “일본 정부는 1998년 10월에 발표한 한일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완곡히 말하는 데 그쳤다. 앞서 윤 대통령이 국내 지지율 하락을 무릅쓰고 양국 관계 정상화와 미래 파트너십 발전을 위해 일제 강제징용 한국인 피해자 배상문제 해결의 총대를 멨다. 그에 비하면 기시다 총리의 호응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물론 기시다 총리로서는 이번 회담에서 공개적으로 사과 표명시 올해 4월 지방선거와 7월 참의원 선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 역시 내년 4월 총선을 마주해야 하는 처지다. 일본의 호응 없이는 윤 대통령이 더 이상 다가서기는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만약 윤 정부가 내민 화해의 손을 기시다 총리가 맞잡지 않는다면 한일 관계는 앞으로 어느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풀어나가기 힘든 초장기 경색 국면에 빠져들 것이다.

사실 지난 12년간 한일 관계 경색은 역사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양국 간 경제·외교·안보 차원의 전략적 상생구조가 느슨해진 것이 보다 근본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우선 2000년대 들어 한층 가속화된 글로벌 생산기지화로 인해 기존 제조업의 한일 분업 구조가 약화됐다. 중국의 군사적 팽창 속에서 미국이 주한·주일미군 감축·재편 움직임을 보이면서 전통적인 한미일 안보협력의 고리도 도전받았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일본 내에서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에 연루돼서는 안 된다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양국 간 전략적 이해관계가 느슨해지다 보니 역사 문제 등의 갈등으로 벌어진 한일 관계를 정상화시킬 복원 탄력성이 떨어진 것이다. 양국 정상이 한일 파트너십을 복원하려면 경제·외교·안보 차원의 전략적 이해를 수렴시키는 근본적 접근을 해야 한다.

다행히 기시다 총리의 하반기 서울 답방 가능성이 외신 등을 통해 전해진다. 이르면 7~8월, 혹은 10월 일본 의회 개회 이전이 될 가능성도 있다. 마침 7~10월은 대한민국 전역에 무궁화가 만발하는 시기다. 무궁화는 먼저 핀 꽃이 며칠 후 시들어 떨어지더라도 곧바로 새 꽃을 피워 100여일간 아름다움을 뽐낸다. 과거를 딛고 미래를 여는 꽃이라고 할 만하다. 25년 전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피운 양국 우호의 꽃이 이후 외교적 갈등으로 잠시 시들었더라도 양국 정상이 7~10월 ‘윤석열·기시다 선언’을 통해 다시 무궁화처럼 만개시키기를 기대한다.

민병권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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