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부 “철거 아냐”라지만…육사 “외부 이전 검토”
육군사관학교 내에 설치된 ‘독립전쟁 영웅’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주장이 퍼지는 가운데 국가보훈부는 “철거가 아닌 이전”이라고 해명했다. 그렇지만 육사 측은 “외부로 옮기는 방안도 검토한다”고 밝혀 사실상 5인의 흉상이 육사에서 쫓겨나는 것이란 해석도 분분하다.
보훈부는 25일 "오늘 오전 여천홍범도장군·우당이회영·신흥무관학교·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에서 국회 기자회견을 통해 제기한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며 "구체적인 사실관계 확인도 없는 일방적이고 터무니없는 주장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앞서 홍 장군 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각 단체 관계자들은 국회에서 회견을 열어 “현재 육사 내에 설치돼 있는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 보훈부 지시로 철거될 예정”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다만 육사 측은 “생도들이 학습하는 충무관 중앙현관 앞에 설치된 독립군 흉상은 위치의 적절성, 국난극복의 역사가 특정 시기에 국한되는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있다”며 “이들 흉상을 교내 다른 장소로 이전하거나 외부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 중인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흉상의 외부 이전 가능성을 열어놔 ‘철거’ 비판을 자초한 셈이다.
실제 기념사업회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육사는 이들 흉상을 현재 위치에서 철거해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고자 했다. 육사의 요청을 받은 독립기념관이 전시는 어렵지만 수장고에 보관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던 것으로 기념사업회 측에서 확인했다.
국방장관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중점”
또 육사는 학교 정체성과 설립 취지를 구현하고 자유민주주의 수호 및 한미 동맹의 가치와 의의를 체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중점을 두고 기념물 재정비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는 정부 지시가 아니라 학교 자체 계획이란 게 육사 측 설명이다.
그러나 육사의 이 같은 방침은 이날 국회 국방위원회에서도 야당 의원들의 비판을 불렀다. 이에 대해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북한을 대상으로 전쟁을 억지하고 전시에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곳인데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느냐는 지적이 있었다"라고 해명했다.
이어 "가능하면 육군 창설이나 군 관련 역사적 인물로 하면 좋겠다는 것"이라며 "그렇다고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앞서 홍범도장군?우당이회영?신흥무관학교?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군의 기원인 독립전쟁의 역사를 뒤집으려는 매우 심각하고 엄중한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념사업회 "친일군인 동상 세울 의도…국군 뿌리는 광복군”
또 이들은 ‘국군의 뿌리’를 광복군 대신 친일 경력이 있는 백선엽 장군으로 바꾸려는 의도가 있을 가능성을 지적했고 보훈부 등의 개입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했다.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인 이준식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친일군인 동상은 버젓이 세우고 독립전쟁 영웅 흉상은 철거하고. 도대체 대한민국이 맞는가”라며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되찾으려고 했던 주권국가 대한민국의 모습이 과연 이런 것일까. 후손으로서 심한 자괴감이 들었다”라고 한탄했다. 이 공동대표가 말한 ‘친일군인’은 백 장군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백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 1사단장으로서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을 격멸하는 등 전과(戰果)를 거뒀지만 일제강점기 항일투사들을 체포·약탈·고문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사실이 알려지며 친일파로 기록된 인물이다. 백 장군은 회고록 ‘간도 특설대의 비밀’을 통해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소회했다.
김좌진 장군의 손녀 김을동 전 의원도 국군의 뿌리는 독립군·광복군이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는 임시정부 국무원령 205호에 의거해 설립돼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임시정부 휘하의 군대인 북로군정서와 김좌진 장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효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육사의 흉상 철거·이전 시도를 용납할 수 없다고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북로군정서 등이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가 돼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부정하고 국군의 모태를 철거하는 건 항일 무장투쟁의 위대한 역사인 청산리대첩과 봉오동대첩까지도 부정하는 행위"라면서 "이것을 부정하려면 헌법부터 바꾸고 임시정부부터 부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재인 지우려 국군 정통성 흔들어” 비판
아울러 독립전쟁 영웅 5인 흉상 철거·이전 시도가 '문재인 정부 지우기'를 위한 행보라고 의심했다. 이들은 "독립전쟁의 영웅 흉상을 철거하고 독립전쟁의 역사를 지우려는 윤석열 정부의 시도를 당장 멈추시라"며 "'문재인 정부 지우기'를 하려다가 우리 '국군의 정통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지 마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윤석열 정부는 반헌법적 발상으로 독립전쟁의 역사를 훼손하려는 만행의 진상을 밝히고 국민께 사과하시라"라고 촉구했다.
실제로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10월 “6.25 전쟁사나 북한학 등이 육사 교과과정의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변경하는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건 문재인 전 대통령”이라며 홍범도 장군 흉상 설치를 문제 삼기도 했다. 당시 그는 "공산주의자 간첩 신영복을 존경하고, 6·25 남침 주역인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라 하고 홍범도 흉상을 육사에 걸라고 하는 등 문 전 대통령이 국군을 어떻게 만들고자 했는지 다 드러났다"라고 질타한 바 있다.
단체들은 국가보훈부를 향해서도 "보훈부 승격 이후 행보가 우려스럽다"며 "본연의 역할보다 가짜 유공자 서훈 박탈 논란, 백선엽 장군의 친일행적 삭제, 홍범도 장군의 서훈을 문제 삼더니 이제는 독립전쟁의 역사까지 부정한다는 의심이 든다"고 날을 세웠다.
육사 내 홍 장군 등의 흉상은 지난 2018년 제99주년 삼일절을 맞아 우리 군 장병들이 사용한 5.56㎜ 소총 5만발 분량의 탄피 300㎏을 녹여서 만든 것이다.
당시 육사는 "총과 실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음에도 봉오동·청산리 대첩 등 만주벌판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며 조국독립의 불씨를 타오르게 한 선배 전우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들 흉상을 설치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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