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 시절 가혹한 공산주의 통치에 반(反)러시아 정서가 팽배했던 중부 유럽 슬로바키아에서 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SD·스메르)이 총선 승기를 잡았다. 어느 국가보다도 러시아에 감정이 좋지 않은 슬로바키아에서 친(親)러 행보 정당의 승리는 그만큼 우크라이나 전쟁과 난민 수용 문제로 국민들의 피로감이 쌓였음을 나타낸다. 연일 미국·유럽연합(EU)과 대립하며 서방의 우려를 낳고 있는 사민당의 중심에는 변호사 출신의 로베르트 피초(사진) 전 총리가 있다.
슬로바키아 총리를 두번이나 지낸 피초는 노동자 계급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공산주의적 가치관을 지녔지만, 친러 성향이라기보다는 자국 실리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국회의원과 총리를 역임하며 슬로바키아의 EU가입과 유로화 사용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성공시킨 인물이다. 코메니우스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유럽인권재판소의 법률 고문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 지난 2016년에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두고 “영국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지 않다”며 영국이 EU에 남는 27개국보다 큰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아울러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밝히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역시 비난한 바 있다.
누구보다 EU 가입에 따른 경제적 혜택을 잘 아는 그가 왜 EU에 반기를 든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그는 경제적 이유를 댄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가가 폭등한 상황에 EU의 적극적인 난민 수용 및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가 자국 경제 위기를 심화시킨다는 주장이다. 슬로바키아의 지난달 소비자물가(CPI)는 전년대비 8.9% 상승했으며 우크라이산 곡물 유입으로 슬로바키아 곡물 가격이 폭락해 농가들의 피해가 이어졌다. 이 와중에 슬로바키아의 정부 예산은 국내 사안이 아닌 난민과 우크라이나 지원에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피초 전 총리의 친러 행보가 정권 탈환을 위함이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지난 2018년 정부의 비리를 파헤친 기자가 피살당한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여론 악화로 총리직에서 사퇴한 그가 이전 정부의 난민 수용·우크라이나 지원 관련 국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켜 3선을 노린다는 분석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