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이 더 지난 일이 여전히, 오늘날의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일이 가능할까. 물론이다. 예술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17세기 화가 데이비드 베일리의 ‘바니타스 상징들과 함께 한 자화상(1651)’이 그렇다. 베일리는 전혀 유명한 화가도 아니다. 하지만 목판 위에 유화로 그린 이 그림이 미술사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그림처럼 얼굴로 가득한 그림은 없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모두 존재의 유한함을 상징한다. 불꽃을 내며 주변을 밝히던 촛불은 언젠가는 꺼진다. 잠시 공중을 부유하는 거품들과 무엇이 다르랴. 인생은 잠시 피어났다 이내 시들어가는 꽃이다. 소중한 것을 담았던 유리잔도 엎어지고 만다. 많은 진주와 금화도 소용이 없다. 해골과 모래시계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계수할 것을 촉구한다.
보편적인 지혜의 근원은 자신을 존재적 유한성 앞에 세우는 것이다. 17세기의 베일리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림 왼쪽의 청년은 전성기 시절의 데이비드 베일리이다. 그러므로 이 그림의 주제는 그림 오른쪽, 테이블 가장자리에 걸려 있는 글자인가. ‘바니타스 바니타툼 에트 옴니아 바니타스(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곧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인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렇다.
하지만 그림의 한가운데 타원형 초상화에 등장하는 여인만큼은 예외적으로 젊고 매력적이다. 그림의 한가운데서 모든 죽음의 상징들을 초월해 있는 듯한 이 여인은 베일리의 사망한 아내다. 베일리는 그녀를 다시 불러와 젊음을 불어넣고 보편적 지혜의 장에 포함시킨다. 죽음만이 이 그림의 주제가 아니다. 모든 것이 헛되지만 오직 사랑만이 그 공허를 능히 견딜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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