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는 APEC 자체의 의제보다는 미중 정상회의와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정상회의가 더 주목받았다.
어렵사리 성사된 미중정상회담에서 양국은 군(軍)대화 재개, 펜타닐 원료 생산 기업 및 수출 단속, 인공지능(AI) 위험·안전 방안 협의, 온실가스 배출 감축 등에서 원칙적인 합의를 도출했다. 하지만 미국은 트럼프 관세 철폐, 첨단 반도체 수출통제 중지 등 중국의 요구 사항에 대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가 예견됐음에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정상회담을 한 것은 각자 정치 경제적인 성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내년 대선을 준비하는 바이든 대통령은 미중 관계를 제대로 관리하고 있음을 자국 유권자에게 보여줘야 했고 국내 경제난에 직면한 시 주석은 미국과의 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해야만 했다.
이번 미국의 APEC 정상회의 개최로 APEC 위상이 회복될 수 있다는 전망도 가능하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APEC보다 IPEF가 인태 지역의 경제협력체로서 더 주목받을 것 같다. IPEF는 인태 지역에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를 억제하기 위해 미국이 추진한 다자 경제협의체다. 지난해 5월 공식 출범한 후 미국을 비롯해 한국·일본·호주·인도 등 14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IPEF의 4대 필라(핵심 의제) 중 공급망 협정은 올 5월 체결됐고 청정경제협정과 공정경제협정은 정상회의 직전 개최된 IPEF 장관회의에서 타결됐다. 또 핵심 광물을 포함한 역내 공급망 리스크 관리 방안도 합의됐다.
청정에너지·재생에너지·탈탄소 등의 사업을 위해 2030년까지 1550억 달러 이상의 공공 자금이 투입될 청정경제협정은 세계적인 조류인 그린경제 달성에 기여하는 내용을 담았다. 청정에너지원 개발 및 생산 과정에서 탄소 저감 기술을 적용하고 IPEF 진영의 에너지 산업에서 기술·규범·표준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탄소 전환 산업 투자를 위해 참여국들은 매년 ‘IPEF 청정경제 투자자 포럼’을 개최하기로 했다. 역내에서 탈탄소 산업이 커지면 우리나라가 강점을 가진 원전,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소 플랜트 등 재생에너지 산업의 수혜가 기대된다.
공정경제협정에서 참여국들은 유엔 반부패 협약 준수를 기본으로 부정행위 신고자에 대한 보호 대책, 부정부패 공무원 징계, 정부 조달 불법행위 처벌 규정 정비 및 청렴 입찰자와의 계약 체결 등을 통해 부패를 뿌리뽑기로 했다. IPEF 참여국의 공정경제협정 발효로 경쟁 환경이 조성되면 우리 기업들은 성장 잠재력이 높은 개도국에 대한 인프라 구축 및 내수 시장 진출, 정부 조달 사업 참여가 활성화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핵심 광물 공급망 협력은 가장 가시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다. 핵심 광물 생산과 수출에서 최대 강국인 중국은 미국의 경제 제재에 대한 핵심 광물 무기화로 대응하고 있다. 중국은 올해 반도체 소재인 갈륨과 게르마늄에 대해 임시 수출통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흑연에 대한 임시 수출통제를 발표했다. 우리나라는 미국·중국 등 세계 주요국의 전략물자 수출통제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 수출통제 역량을 확충해야 한다.
이번 IPEF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자국이 추진해온 ‘IPEF 핵심광물 대화체’를 내년에 출범하기로 했다. 첨단산업 제품 생산에 필수적인 주요 광물의 공급망 다변화 및 안정적 수급이 목적이다. IPEF 정상회의 연설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IPEF는 IPEF의 공급망을 더 강화하기 위해 핵심 광물 대화를 출범한다”고 밝혔다. 한편 우리나라는 IPEF 내 인적 교류 활성화를 위해 ‘IPEF 네트워크'를 제안했고 내년부터 인태 지역 인적 교류 행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크게 보면 APEC과 IPEF는 중첩되는 부분이 많다. 내년부터 IPEF 행사는 APEC과 연계돼 추진될 가능성이 높고 올해와 마찬가지로 IPEF에 대한 관심이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2025년 APEC 정상회의를 개최할 우리나라는 APEC 못지않게 IPEF 의제 발굴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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