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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산업 자본 형성 기틀을 닦다…농지개혁 이야기 2 [이덕연의 경제멘터리]

[이승만 정부 - 농지개혁편 2회]




흥미로운 경제 역사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고도 성장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각각 남긴 경제 공과(功過)는 무엇일까요.

결정적인 사건을 사실과 통계를 바탕으로 깊고 공정하게 다룹니다. 가끔은 세계 대공황, 영국 산업혁명, 동·서양 대분기(大分岐·Great Divergence), 일본 근대화, 중국 개혁·개방과 같은 세계 경제사 속 거대 담론도 들여다봅니다.

역사학자 E.H. 카가 남긴 명언을 활용해봅니다. 현재와 과거 사이, 끊임없는 지적인 대화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화 ‘건국전쟁’ 중 이승만 전 대통령이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다큐스토리프로덕션




여권이 쏘아올리고 야권이 받으며 확산한 ‘이승만 재평가’ 논란의 핵심은 농지개혁이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남긴 공과(功過) 중 비로소 최근 들어서야 역사적 조명을 받고 있다. 농지개혁은 단군 이래 줄곧 한반도 지배 계급이었던 지주층을 와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관련 기사 '건국전쟁'이 좋든 싫든 알아야 할 진짜 농지개혁 이야기 1) 이는 여러 경제사학자들이 면밀히 입증해낸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농지개혁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많다. 오해를 바탕으로 성과를 축소하거나 부풀리는 이들도 있다.

이 기사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대표적인 사실 몇 가지를 살펴본다. ①농지개혁은 일본, 대만도 실시했다. ②한국 농지개혁은 미군정이 시작했다. ③지주들이 법 시행 이전 처분한 농지 면적은 개혁 대상이 된 농지 면적보다 크다. ④농지개혁은 사유재산을 가진 시민 계층을 형성해 경제·정치·사회·교육·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⑤기업가들은 농지개혁 때 발행된 ‘지가증권(地價證券)’을 활용해 기업을 키울 수 있었다.

①공산주의 확산과 동아시아 농지개혁


레닌 동상과 소련 국기의 모습. 세계 2차대전 종전 후 공산주의는 빠르게 세력을 넓혔고, 이는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체제·안보 위협으로 다가왔다. 사진 제공=이미지투데이


“일본의 농지개혁은 외국의 경우와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2차 세계대전 후 가장 빠른 시기에 실시되었다.”(쇼지 슌사쿠(庄司俊作) 2014, 123p)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파시즘 진영이 몰락하자 세계는 냉전에 접어들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 일부에서 빠르게 세력을 넓혔다.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농지개혁 실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오쩌둥을 필두로 한 중국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인 1946년 농지개혁을 시작해 1952년 마무리했다. 한반도 38선 이북에서도 김일성 중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자유주의·자본주의 국가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산업화를 이뤘지만 여전히 지주가 농촌을 지배했다. 북한·소련·중국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 비교적 안전했으나 일본 사회의 민주화와 비군사화를 위해서는 체제 개혁이 필요했다. 지주에 종속된 소작농은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어렵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 최고사령부(GHQ)는 농촌 빈곤이 군국주의로 이어졌다 보고 일본 정부에 농지개혁을 명령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1945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 최고사령부(GHQ) 최고 사령관이기도 했다. 사진은 1945년 8월 2일 필리핀에서 촬영한 맥아더 장군의 모습. 사진 제공=미 해군 역사 센터(Naval Historical Center)


일본은 1946년 농지개혁법을 제정·공포했다. 시기가 중국·북한과 겹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법 공포 시점으로 보면 북한은 3월, 중국 일부 지역은 5월, 일본은 10월 농지개혁에 나섰다. 앞서 인용한 ‘일본 농지개혁 시기가 가장 빨랐다’는 일본 경제사학자 쇼지 슌사쿠 교수의 설명은 자유주의 진영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농지개혁으로 193만 정보(약 1만 9140㎢)의 농지를 지주에게서 매입해 싼 값에 소작농에게 매각했다. 193만 정보는 당시 전체 소작지 245만 정보의 78.8%에 이르렀다.

대만은 1949년 농지개혁을 시작해 1953년 완료했다. 중국 대륙에서 국공내전에 패하고 건너온 국민당 정부가 개혁을 주도했다. 대만 농지개혁은 현지에서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경제·사회 각 방면에서 이룩한 발전의 토대로 작용하며 ‘대만 기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권위주의 정부가 무리하게 개혁을 실시해 소(小)지주와 심지어 소작농이 피해를 봤다는 의견도 있다.(쉬 스롱(徐世榮)·랴오 리민(廖麗敏) 2014, 183p).

1950년대 부산 해운대 농촌 마을 풍경. 사진 제공=대한민국역사박물관


②미군정, 38선 이남 농지개혁 첫 발을 떼다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지만 미군이 38선 이남에 진주한 것은 같은 해 9월 8일이었다. 반면 소련이 한반도에 진입한 날짜는 8월 8일이다. 미국이 한 발 늦게 온 것은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 계기가 된 히로시마 원자폭한 투하 당시 미군이 오키나와에 있었기 때문이다. 9월 20일 비로소 조선총독부를 폐지하고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미군정)’을 설치한 미국의 최우선 목표는 38선 이남 지역의 사회 안정과 자유민주주의 체제 정착이었다.

미군정은 북한의 빠른 농지개혁이 남한 사회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봤다. 북한이 1946년 3월 실시한 농지개혁은 단 20일 만에 완료됐다. 38선 이북 소작농은 불과 3주 만에 농지를 무상 분배받았다. 당시 남한 소작농 비율은 가구 기준으로 83.4%였고 농지 면적 기준으도 63.4%에 달했다.(조선은행, 1948) 미군정은 이런 농촌 사회 구조가 공산주의 침투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당시 남한 정치권은 좌, 우, 중도 세력 간 대립으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존 리드 하지(왼쪽) 미군정 사령관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제공=국사편찬위원회


북한 농지개혁 직후 미군정은 남한에서도 농지 소유 구조를 개혁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1947년 초 ‘토지개혁안’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상정했으나 대부분 의원이 지주 출신이었던 탓에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38선 이남 농지개혁이 첫 발을 뗀 시기는 1948년 3월이다. 이때 미군정은 귀속농지매각령을 발포하면서 일제가 남기고 간 과거 일본인 지주 소유 농지를 소작농에게 매각했다. 당시 매각 조건은 연 생산량의 3배 만큼을 15년 동안 상환하는 것이었지만 1951년 상환 배율이 1.5배로 줄어들었다.

곧 살펴보겠지만 미군정 시기 농지개혁은 추후 지주 자산이 농민과 기업가로 옮겨가는 데 상당한 영향을 줬다. 정부가 실제로 농지를 강제 취득해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지주를 압박했기 때문이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대한민국 건국 헌법은 심지어 농지개혁을 본문에 명시했다. 건국 헌법 제 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고 못박았다. 진퇴양난에 처한 지주는 하위법 공포 이전에 농지를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8년 5월 31일 개회한 제헌국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이승만기념관


③농지 사전 처분…여전히 지주에게 손해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 15일 수립되고 1950년 3월 10일 농지개혁법(정부 개정안)을 공포하기 이전에 지주는 71만 4000 정보(약 7081㎢)에 달하는 소유 농지를 시장에서 처분했다. 이는 농지개혁법 대상이 된 농지 면적 30만 2000정보의 두 배 이상이다. 미군정이 처분한 농지 27만 3000정보와 비교해서도 훨씬 크다. 1945년 전체 소작 면적인 144만 7000정보의 절반 가량이 농지개혁법 제정 이전 지주들에 의해 사전 방매(放賣)됐다.

지주가 급하게 농지 처분에 나선 데에는 미군정이 실시한 농지 개혁 외에도 여러 요인이 있다. 우선 지주 중에는 일제에 협력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1945년께 일제 패망이 국내에서도 가시화되면서 공동체 내에서 지주가 가지는 입지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들의 농지 사전 처분이 1945년 이전부터 이뤄진 것으로 파악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을 단위에서 지주들은 친일 세력으로 몰려 발언권이 없었다. 심지어 소작인이 소작료를 지불하지 않는 경우에도 지주들은 당할 수밖에 없었다.”(전용덕 1997, 116p)

소작료 불납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해방 이후 설립된 민간 자치 단체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 영향력이 강한 지역에서 특히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장상환 1985, 303p) 한 지역의 사회 운동은 인접 지역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해방은 지주와 소작농 간 역학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소작농이 가지는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지며 지주 입장에서 소작료 협상, 계약, 징수에 드는 거래 비용이 증가했다. 소유 자산을 통한 거래의 비용이 증가하면 잠재 자산 가치는 떨어지게 돼 있다.

반올림으로 오차가 있음. 자료=농지개혁사연구(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그래픽=이덕연 기자


정리하면 해방 이후 역학 관계 변화로 인한 거래비용 증가와 미군정 농지개혁, 농지개혁 헌법 명시라는 ‘삼중주’가 지주 소유 농지의 사전 처분을 사실상 강제했다. 농지 방매는 농지개혁법 적용 대상이 될 것이 확실시된 대지주 중심으로 이뤄졌다. 비교적 작은 면적 농지를 가진 중소지주는 자신들이 법 적용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1950년 공포된 농지개혁법은 소유 농지 면적이 3정보(약 2만 9752㎡) 이상인 모든 지주를 대상으로 삼으면서 중소지주 몰락에도 큰 영향을 줬다.

농지를 사전 처분한 대지주는 이득을 봤을까? 전혀 아니다. 경제학에 친숙한 독자라면 이미 알아챘을 수 있다. 전국 전체 소작 면적의 절반이 불과 몇 년 사이 시장에 대거 공급됐는데 가격이 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세기 초반 일제강점기 때 일반적인 소작지 가격은 농지 연 수확량의 5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1033p) 반면 해방 이후 사전 처분된 농지는 보통 연 수확량의 1.5배~2배 수준으로 매각됐다.(장상환 1985, 322p) 이 배율은 일본에서는 4배, 대만에서는 2.5배에 달했다. 한국이 농지개혁 영향을 더 크게 받은 것이다.

자료: 한국토지제도의 연속성과 단절성(김성호, 1985). 그래픽=이덕연 기자


한 가지 간과할 수 있는 사실은 당시 농지 수요도 급증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북, 해외 동포 유입이 영향을 줬다. 북한에 공산주의가 뿌리내리고 지주에게 아무런 대가를 주지 않는 무상 몰수 방식 농지개혁이 행해지며 1948년 8월까지 이북에서만 약 66만 명이 넘어왔다. 일본에서는 1947년 11월까지 112만 명 가량이 귀국했고 중국·만주·대만·하와이 등에서는 122만 명이 남한에 왔다. 해방 당시 1614만 명이었던 38선 이남 한반도 인구는 불과 4년 만인 1949년 2017만 명이 됐다.(이영훈 2016, 278p)

농업 중심 국가에서 인구가 늘면 농지 수요는 자연스레 증가한다. 우선 식량 수요가 늘어나 곡물 가격이 오르고, 농지에서 나오는 생산물 가격이 오르니 땅 값이 올라간다. 인구 자체가 증가하면서 농사를 지으려는 이가 늘어 값이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결국 당시 농지 수요는 분명 증가했던 것인데 각종 자료에 따르면 농지 가격은 크게 떨어졌던 것이 확인된다. 경제학적으로는 이를 공급 증가분이 수요 증가분을 웃돌아 일어난 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수요 증가는 가격 하락을 어느 정도 방어해 대지주가 중소지주보다는 피해를 덜 보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1955년 흥인지문에서 바라본 종로의 모습. 사진 제공=국립고궁박물관


④대한민국 시민 사회 기틀을 다지다


농지개혁 성과를 ‘지배 계급 몰락’이라는 단편으로 한정해 봐서는 곤란하다. 농지개혁은 일반 시민 사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우선 비로소 자기 재산을 가지게 된 과거 소작농은 법 공포 이후 불과 3개월 만에 발발한 6·25 전쟁 때 물러서지 않았다. 피 튀기는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고 약 3년 동안 이어진 전쟁 중 북한에 타협하지 않았다. 이는 안보 측면의 눈부신 성과다. 정치·사회·교육 방면으로도 큰 성과를 내면서 일반 시민들이 자식을 학교에 보내고, 정치에 참여하고, 사회 활동을 하는 데 영향을 줬다.

경제적 영향도 거대했다. 앞서 살펴봤듯 소작농은 당시 시장 정상가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농지를 지주 또는 정부로부터 구입했다. 정부가 농지개혁법에 따라 농지를 소작농에게 유상 분배할 때 현금이 아닌 쌀이나 보리 같은 현물을 5년에 걸쳐 받으면서 입은 혜택도 컸다. 이는 0% 금리로 구입 대금 전액을 대출 받아 아파트를, 그것도 시장가의 절반으로 산 것과 비슷하다. 소작농이 은행 대출을 받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해 당시 평균 사채금리 연 48%를 적용하고, 경제·경영학 이론 현재가치(PV)법에 따라 계산하면 농민이 상환한 실질 금액은 연 수확량의 0.795배에 그친다.(전용덕 1997, 127p)

또 이승만 정부는 전후(戰後) 특수 상황을 고려해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에게 각종 혜택을 줬기 때문에 이들이 입은 경제적 수혜는 더 컸다. 당시 정부는 농민들이 법정 상한 기한인 5년을 넘겨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법 개정을 통해 상환 기관을 늘려주는 모습을 보였다. 1950년 분배된 농지 약 25%는 1960년까지 상환됐고 5%는 1970년이 돼서야 현물 납부가 완료됐다. “결국 평균 상환기간은 5년이 훨씬 넘고 최장 20년이라는 것이다.”(전용덕 1997, 128p) 다만 농지개혁이 농지 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는지를 두고는 학자별로 평가가 갈리고 있다.

자료: 농지개혁사연구(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그래픽=이덕연 기자


⑤기업가, ‘헐값’ 지가증권으로 공장을 인수하다


농지개혁을 논할 때 마지막으로 꼭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다. 농지개혁은 한국 산업자본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줬다. 정부는 농지개혁 때 지주에게 지가증권(地價證券)을 교부했다. 지가증권은 지주가 매각한 토지 대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닌 문서라 보면 된다. 국채나 기업 채권이 시장에서 거래되듯 이 지가증권도 지주가 내다 팔 수 있었다. 문제는 지가증권 시장 가격이 매우 낮았다는 것. 전쟁 때 지가증권은 토지 대금의 23~25%, 전후 인플레이션 때도 약 25% 수준으로 거래됐다.(대한증권협회 1963, 18p)

팔려는 사람은 많은데 사려는 사람은 비교적 적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 때 피난을 간 지주들은 생활고를 겪었다. 땅을 넘긴 대금이나 현물은 들어오지 않고 물자는 부족하니 대부분 지주가 어려웠을 것이다. 지가증권이라도 팔아 현금을 얻어야 했는데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가 많았다. 전후에는 인플레이션이 강하게 일어나며 토지 대금(액면가)이 고정된 증권 가격을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생활고에 처한 지주는 증권을 거래했다.

1950년 농지개혁으로 실제 발행된 지가증권의 모습. 사진 제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에는 상당수의 기업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미 부를 어느정도 축적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을 가지고 사업을 일구는 중이었다. 이들에게 지가증권은 커다란 기회였다. 정부는 지가증권을 활용해 일제가 남기고 간 기업체·공장·부동산을 인수할 수 있도록 했고 액면가(토지 대금) 만큼을 인수 대금으로 인정해줬다. 기업가들은 시장에서 싼 값에 거래되는 지가증권을 사 기업체를 인수했고 성장시켰다.

마지막으로 지주를 살펴보자. 앞서 봤듯 농지개혁 과정에서 대지주와 중소지주 모두가 피해를 입었다. 농지개혁 이후 일부 대지주는 지가증권으로 기업체를 인수해 산업자본을 형성하려 했지만 일부만 성공하고 대다수는 실패했다. 그들은 농지 지대(地代)를 받아 새로운 땅을 구입하며 부를 늘리는 데에는 재주가 있었지만 사업가 기질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가증권의 54%가 일제가 남긴 귀속재산(歸屬財産) 구입에 쓰였고 신흥 자본가들이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지주자본은 간접적으로 산업자본으로 전환했다.(이헌창 2021, 445p)


이승만 정부 농지개혁편을 마치며


이승만 전 대통령은 공과(功過)가 있는 인물이다. 다양한 행적 중 최근까지 비교적 조명이 덜 됐던 것이 농지개혁이다. 기사 전반을 통해 짚었듯 농지개혁은 공산주의 확산에 따라 동아시아 전반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고 한국 농지개혁을 첫 시작한 것은 미군정이다. 하지만 이를 전면 실시해 시민 계층 형성에 영향을 끼치고 산업자본이 발돋움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적 지원을 한 것은 1950년대 한국 정부다. 이 사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작업은 기초 공사다. 부실한 지대에 올린 철큰콘크리트 구조물은 결국 무너진다. 1950년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터를 파는 시기였다. 농지개혁 성공은 기초 공사의 완성과도 같았다. 2024년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다. 마치 고층 빌딩과 같다. 고층 빌딩은 부실한 땅 위에 짓지 못한다. 현재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대한민국 주식회사’는 농지개혁으로 다져진 땅 위에 세워졌다.

2024년 첫날 대한민국의 정치·금융 중심지 서울 여의도에 갑진년(甲辰年) 새해 첫 해가 힘차게 떠오르고 있다. 오승현 기자


◇참고 문헌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지개혁사연구(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유용태 등, 동아시아의 농지개혁과 토지혁명(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홍성찬 등, 농지개혁 연구(연세대학교 출판부, 2001)

전용덕 등, 한국경제의 성장과 제도변화 중 “제3장 한국의 농지개혁, 소득 재분배, 농업생산, 그리고 거래비용”(한국경제연구원, 1997)

이헌창, 한국경제통사 중 “제 10장 8·15 해방 이후 국민경제의 형성(1945~61년)”(해남, 2021)

김낙년, 한국경제성장사 중 “제 9장 해방, 분단, 전쟁과 원조경제”(해남, 2023)

정기화, 최광 등, 기적의 한국경제 70년사: 농지개혁에서 K-POP까지 중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과 초석”(북앤피플, 2018)

이영훈, 한국경제사 2: 근대의 이식과 전통의 탈바꿈 중 “제 10장 독립”(일조각, 2016)

이연호, 불평등발전과 민주주의: 한국정치경제론(박영사, 2013)

박명호, 2012 경제발전경험모듈화사업: 한국의 농지개혁(기획재정부, 2013)

고영선, 한국경제의 성장과 역할: 과거, 현재, 미래(한국개발연구원, 2008)

※[이덕연의 경제멘터리] 3회로 계속.

※3회는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가장 중요한 경제 정책이었던 ‘수입대체공업화’에 대해 다룹니다. 당시 국내 산업계 형성에 영향을 준 미국의 경제 원조와, 해방 이후 일제가 남기고 간 기업·공장·부동산 불하(拂下) 이야기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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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202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명목, 달러 기준) 변화. 경제 그래프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료=한국은행. 그래픽=이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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