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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없는 사진 거장의 전시…"이것은 사진이 아니다'

PKM갤러리, 토마스 루프 개인전, 'd.o.pe' 개최

사진 대신 디지털 이미지 활용한 신작 소개


커다란 직물을 가득 채운 곰팡이 포자 무늬. 작품은 황홀하고 아름답지만 ‘사진’은 아니다. 독일의 사진 거장 토마스 루프(66)의 전시회인데 전시장 어느 곳에서도 사진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작품 어디에 카메라가 사용된 것이냐”고 물었다. 작가는 “이 작품에는 카메라가 사용되지 않았고, 이 작품들은 사진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토마스 루프가 자신의 신작 ‘d.o.pe’ 연작을 아시아 최초로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공개했다. 지난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개인전 이후 한국에서 20여 년 만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으로 그간 자화상, 과학사진, 보도사진 등 사진과 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수많은 혁신을 선보인 작가의 또 다른 ‘디지털 파격’을 볼 수 있는 자리다.

PKM 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토마스 루프. 그는 20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 ‘d.o.pe’를 열었다. /연합뉴스




이번 전시에 작가가 출품한 작품은 ‘카펫’이다. 카펫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잔뜩 놓여 있다. 언뜻 보면 곰팡이 포자나 물 위에 번진 유화 물감처럼 보이는 ‘프랙털(fractal)’ 이미지다. 프랙털은 컴퓨터 그래픽 용어로, 작은 형태가 자신과 닮은 형태를 끝없이 증식하는 구조를 말한다. 전체의 형태가 작은 형태와 유사한 구조를 이룬다.

전시장에 걸린 카펫 중 일부는 약 290cm에 달한다. 바로크 시대의 궁전 벽지 무늬가 연상될 정도로 웅장하고 장엄하다. 작가는 각 이미지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제작해 이 패턴을 염색하듯 카펫 위에 출력했다. 특히 하나의 패턴이 아닌 여러 개의 패턴을 다양하게 합성해 이미지는 심해의 산호가 뒤엉킨 듯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작가는 칸디다 회퍼, 토마스 스트루스 등 독일 뒤셀도르프 사진학파의 주요 멤버다. 과거 작가 역시 다른 작가들처럼 ‘사진이 현실을 포착할 수 있다’고 믿고 현실을 잘 반영하는 사진을 찍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작업이 반복될수록 카메라 렌즈 앞에 놓인 현실 역시 사실은 연출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을 잘 찍기 위해 구성물의 위치를 기획하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피사체를 찾아다니는 과정 자체가 연출이라는 것. 그 후 그는 신문사진(Zeitungsfotos)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데이터를 수집한 이미지, 일본 만화책에서 가져온 이미지를 인화한 ‘서브스트라트’ 연작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다양한 사진 실험을 이어갔다. 이번 ‘d.o.pe’부터는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이미지를 인화지가 아닌 카펫에 출력하는 ‘이미지 작업의 극단’을 선보인다.



토마스 루프의 ‘d.o.pe’. 사진 제공=PKM갤러리


토마스 루프의 ‘d.o.pe’. 사진 제공=PKM갤러리


작가는 캔버스 대신 카펫을 선택했다. 카펫에는 이미지가 세세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재의 고유한 특성 덕분에 관람객이 이미지에 빠져드는 듯한 깊이감이 생긴다. 카메라와 인화지가 사용되지 않았으니 이 작품은 당연히 사진이 아니다.

정체성이 ‘사진 작가’였던 토마스 루프가 사진을 버린 것일까. 작가의 설명은 오히려 반대인 듯하다. 작가는 “사진은 기술적인 매체이고 기술은 2000년 이후 항상 개선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며 “(지금) 그 개선의 방향이 디지털화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스승인 베른트 베허는 ‘어떤 매체로 작업한다면 우리의 작품에 그 매체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며 “동시대 사진가, 사진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로서 기술적인 문제를 사진으로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AI) 시대에 프랙털과 같은 이미지 생성은 몇 번 만으로도 제작이 가능한 것 아닐까. 작가는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AI는 학습된 이미지 이상의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며 디지털화와 AI의 차이를 설명했다. 전시는 3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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