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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일 칼럼]법치의 실종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초등학교 시절 미국에서는 거리가 매우 한산한 새벽 4시에도 빨간불이 켜지면 차들이 모두 정지선에 서서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린다고 배웠다. 당시에는 선진국의 시민의식이라고 동경했지만, 정작 유학하며 직접 미국 사회를 체험해 보니 그것은 시민의식이 아니라 법치의 결과였다. 새벽 4시라도 신호를 위반하면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순찰차가 나타나고, 범칙금이 부과됐다. 시민의식이 선진화된 것이 아니라, 선진화된 법률과 그 집행 방식이 선진화된 행동을 이끌어낸 것이었다. 이렇듯 법은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합리적인 내용과 엄정한 집행에 기초한 법치(rule of law)는 건전한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건이다.

법치의 기본은 ‘법은 무차별적(blind)이어야 한다’에서 출발한다.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저울을 들고 있는 것처럼, 법은 내용에 있어서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를 평등하게 대해야 하며, 집행도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해야 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신호 준수나 우측통행과 같은 규정은 법치주의에 부합되지만, 여성의 참정권 제한이나 이민자를 차별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법의 내용이 명확하고 무차별적이며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사법체계가 주어질 때 비로소 각 개인은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법적 결과에 대해 일관성 있게 예측할 수 있고, 그 결과 모든 개인에게 동등한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 국가, 공정한 경쟁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반드시 요구되는 필요조건이다.

단순히 민주적 절차로 법을 만들고 그대로 시행한다고 모두 법치에 부합되는 것도 아니다. 히틀러도 민주적 절차를 거쳐 정권을 쥐었고, 독일 사회를 2차 대전으로 밀어 넣었으며, 나치 독일을 합리화하기 위한 유태인 탄압을 합법화했다. 현 시점의 모든 독재국가도 예외 없이 입법 절차를 거치고, 법을 집행한다. 노벨상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국회를 통한 입법독재를 최악의 독재로 꼽았듯이, 절차와 형식을 지킨다고 법치와 자유민주주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런 사례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법의 내용과 동등한 적용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도 이제 선진국이라 자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법치국가를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진정한 법치라고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도 국회의 마구잡이 입법과 일관성 없는 법 적용의 사례가 너무 일상화돼있다. 다수당이 주도하는 득표를 위한 입법, 자신들의 지지 세력에 보은하는 입법은 이미 관행이 됐고, 가상자산을 보유한 의원이 가상자산에 대한 과세를 유예하는 법안을 발의해도 별 탈 없이 넘어가는 현실에서 보듯 개인의 이익을 챙기려는 입법도 서슴지 않는다. 입법자의 입맛에 맞춰 사익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이며, 하이에크가 그렇게 우려하던 국회 입법독재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법 적용은 어떠한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권력자 눈치를 보는 판결은 우리에게 모두 익숙한 모습이다. 이번 총선에도 어김없이 후보 명단은 전과자, 현재 재판 중인 정치인, 실형이 선고된 정치인들까지 총망라하고 있다. 법이 일반 시민을 보호하고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힘 있는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이 돼가는 느낌이다. 최근 어느 정치인 아들은 옥중 출마한 아버지의 유세현장에서 왜 본인의 아버지만 구속돼야 하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풀어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정치인들도 수감하라는 뜻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법 집행이 불공정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만은 틀림없다. 돈 봉투를 살포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수사 중인 정치인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입맛대로 권력을 휘두르던 정치인들이 정작 자신들이 대상이 되면 법의 형평성이 훼손됐다고 피해자 행세를 한다. 그런 행태를 아무도 더 이상 어색해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고 화가 날 뿐이다. 엉터리 입법과 편향된 법 적용이 반복적으로 누적돼온 사법체계의 결함은 비단 선거판만 흔드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국민의 선택을 왜곡하고 사회를 병들게 해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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